길이 없으면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어라

  • 입력 2012.08.27 17:25
  • 기자명 황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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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으면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어라
-예병주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사업개발본부장

육도삼략, 사기, 손자병법…공자, 맹자, 한비자, 손자 등 무수히 많은 고전과 인문학 서적들이 물질을 버리고 정신을 취하라 가르치고 있지만, 정작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고리타분하게만 들릴 뿐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질문을 던진다면 반드시 돈과 명예를 한 번에 거머쥐고 있는 인물들을 꼽을 것이다. 돈과 명예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이미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돈과 명예만큼 값지고 귀한 것은 없다고 말을 할 것이다.
여기에 ‘정직’과 ‘청빈’을 생애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를 통해 거짓없이 정직하게 사는 법, 청빈하게 살아도 마음의 여유를 안고 살아가는 법, 소신과 패기를 가지고 오로지 한 길만을 걸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고전(古典)을 통해 세상을 배우다

예병주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사업개발본부장이 존경하는 인물은 전한시대 장자방인 장량과 국사무쌍(國士無雙)으로 불린 한신 장군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출신 인물답게 그가 꼽은 생애 최고의 인물 역시 예 본부장 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가 이렇게 고전에 심취하게 된 이유는 가풍에서 비롯됐다.
예 본부장의 고향은 예씨의 집성촌인 경북 청도군 이서면 대전동이다. 무려 200년의 가계를 이어온 엄격한 유교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조부, 외조부 등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이 모두 한학자로 명성을 떨쳤고, 그 결과 영남 제1학자라는 칭호와 더불어 100일장, 유림장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장례식을 지낼 정도로 학식과 인품 모두를 고루 갖춘 집안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책을 잡게 만들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곧은 정신을 강직하게 고수하고 있던 그의 조부 덕분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좌익동조자(빨갱이)가 생겨나지 않았고, 비록 경주 최씨와 같은 큰 가계 철학이나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굶거나 병든 자들이 없도록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라는 가풍을 예 본부장은 잘 따랐다. 예 본부장의 조부는 항상 어린 손자를 불러 앉혀 친히 “수성댁(조부의 택호) 손자가 어떻다는 욕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고전의 구절들을 읽으면서 “한낱 고전이라 고리타분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속에는 지금 우리 시대의 모든 것들이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군인으로써의 첫 발

예병주 본부장은 1969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육사생도 시절 중대장생도, 친목부장, 불교부장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무난한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특히 유머러스한 말주변과 쾌활한 성격 탓에 친목부장을 할 당시 사회를 곧잘 봤다고 한다. 당시 그 사회 내용이 ‘삼국지의 인물’을 비유 묘사하고, 거기에 시(詩)도 곁들여 했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만화도 잘 그려서 육사 신문에 육사 만평, ‘농(땡이)생도’라는 제목을 단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관 후 월남전 참전, 육군대한, 국방대학원, 육군본부 등 경력을 쌓아 여러 훈장들을 받으며 군인으로써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지만, 투철하게 자리잡힌 군인 정신을 잊지 않으려 제1군야전 사령부 예하에서 근무했다.
그는 99년 6월에 전역했다. 무수한 무공훈장, 넘치는 끼를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막상 전역을 앞두고 있으니 이런저런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가 그 당시 주로 했던 고민은 생업에 대한 고민이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 3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을뿐더러, 가진 재산도 넉넉지 않았다. 엎친데덮친격으로 자녀들이 학업까지 마치지 못한 상태까지 처했었다고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예 본부장은 기술사 공부에 죽기살기로 매달렸다. 그 결과 1년 만에 2과목을 합격한 것을 계기로 군인공제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제2의 인생을 살다

군인공제회에서 예병주 본부장이 먼저 맡은 일은 아파트 공사현장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마북동에 위치한 현대홈타운 아파트 건설을 총괄한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항상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했기에 터파기부터 마무리공사까지 학원을 다니면서 일했으며, 시간적 여유가 날 때마다 다른 현장도 부지런히 견학을 다녔다. 공사현장을 책임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누구보다 근면하고 정직하게 일을 했기에 사업개발본부장이라는 직책으로 보답받았다. 그가 사업개발본부장이 되자 군인공제회는 1년에 1조원의 투자, 년 일천오백억 원을 넘나드는 수익창출을 했고, 그야말로 ‘군인공제회의 전성기’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직’과 ‘가난’을 항상 마음에 품고 다녔으며, 결코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2005년 그는 군인공제회를 퇴사했다. 단 한 번의 거짓없이 앞을 보고 달려온 터라 더 이상의 미련은 남아있지 않았다. 퇴사를 하고나서 1억원에 달하는 연봉을 제시하는 회사도 있었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나는 월 300만원의 일꾼일 뿐이다’ 이것은 그가 정도에 지나치지 않게 야망을 꿈꿀 수 있도록 한 생활신조였다. 월 300만원의 사장은 (주)원동방에서 이뤄졌고, 재경청도군 향우회 회장을 6년이나 역임한 것도 그의 인생 최고의 값진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와의 인연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는 전국 13개, 시·도, 군, 구·읍면 나아가 해외지사까지 영역이 분포돼 있는 대규모 단체며, 총 850만명의 회원이 등록돼 있다. 또한 산하에 60여개의 안보단체를 거느린 국방의 제2보루며, 안보의 주체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제32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이었던 박세직 회장이 별세하자 보권선거를 갖게됐고, 뒤를 이어 박세환 회장이 당선됐다. 예 본부장은 그의 비서실장을 한 인연을 계기로 재향군인회의 비서실장으로 입성하게 됐다. 그러나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던 중 무언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직감한 예 본부장은 회장에게 건의해 2010년 12월 말 사업개발 본부장으로 부임됐다. 그가 사업개발 본부장을 맡게 된 이유는 ‘가장 어려운 곳에 내가 가야 한다’는 신조가 발동됐기 때문이다. 상산 조자룡은 ‘전장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신을 담아 오는 것이 군인으로서 가장 호사’라 말했다. 군복을 벗은 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정신은 군인의 그것에 가장 가까웠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았다. 당시 정권 차원에서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말살 정책이 시행돼 대규모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 반대 서명을 벌였고, 정권의 재향군인회 말살 때문에 공공시설 청소용역 및 고철 처리권을 철회했다. 이는 재향군인회의 자금줄을 잘라놓은 셈이었다. 할 수 없이 재향군인회는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경험에도 없는 건설 사업에 무리하게 뛰어들어야만 했고, 무리하게 벌린 아파트, 레저사업이 2008년 말부터 어려워지면서 시행사와 시공사 모두 예상치 못한 부도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를 힘들게 했지만 그의 가슴을 더욱 더 옥죄는 것은 ‘언론이 무리하게 때리는 뭇매’였다. 언론은 ‘아픈 사람’을 ‘죽었다’로 떠들어대며 재향군인회의 사기를 떨어뜨려놨다. 그 와중에 회장선출 선거기간이 되자 마치 재향군인회가 부도를 맞은 양 부풀려서 언론에 제보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군 출신도 생겨났다.
예 본부장은 그 당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뼈 속 깊이 자리잡은 군인정신은 그에게 포기대신 난국을 타계할 수 있는 오기를 가지게 해주었다.
예 본부장은 대책 대신 원칙을 내세웠다.
첫째, 우선 매각할 수 있는 것을 매각하고, 유리한 매각조건과 매각시점을 찾을 것.
둘째, 추가 차입을 억제하고 부채를 상환 할 것.
셋째, 고금리 부채를 저금리 부채로 전환 시킬 것.
그리고 이 원칙들은 지금도 잘 지켜지고 있으며, 모두 단결해 임금의 20~30%를 삭감하고, 구조조정에도 적극 동참하는 결과를 낳았다.
“없는 길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가느냐,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을 한다. 그러나 없는 길도 찾으려 하다보면 반드시 보이는 법이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 되지 않느냐”며 말했다.
그는 항상 전쟁을 앞두고 출전 준비를 하고 있는 전사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알고, 위기를 극복해 영광을 찾으려는 전사. 그 어떠한 고난도 굳건한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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