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더그라운드 뮤직의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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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그라운드’ - 방송에 출연하는 뮤지션들을 통칭하는 말
‘언더그라운드’ - 방송에 나가지 않고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뮤지션, 혹은 주류 음악계를 탈피하고자 하는 뮤지션들을 통칭하는 말.

Keyword - 저항(Resistance), 독립(Independence), 비주류(the Nonmainstream)

경계(經界) - early 1990s
금요일 늦은 시간 홍대 거리를 걷다보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는 곳이 많다. 클럽(Club)이라 불리는 이곳은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현란한 춤이 어우러져 20~30대 청년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불과 20여 년 전의 홍대 클럽은 댄스가 아닌 록이 울부짖던 곳이었다. 언젠가부터 시나브로 흩뿌려지기 시작한 상업주의의 그림자는 이제 홍대 전역에 퍼져 몇 남지 않은 인디 뮤지션의 설 자리마저 위협하고 있다. 대중음악이 점점 거대 자본과 손잡고 ‘인기’를 위한 음악이 양산되며 고유의 스타일을 구축한 대다수의 언더 뮤지션들은 점차 대중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중음악과 인디음악의 차이는 객관적 구분이 어렵다. 대중음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자신을 알리는 데 치중하다면, 인디음악은 그들이 원하는 지향점과 대중의 니즈(Needs)를 교차시키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TV 전파를 타고 데뷔했을 때 대중은 열광했다. 그러나 1994년 정통 헤비메탈을 들고 나타난 록밴드 ‘크래쉬’의 등장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직까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데뷔 후 20년간 인디 신의 하드록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다.

서태지의 등장으로 대한민국 음악사(史)가 뒤바뀐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가수가 앨범의 전체 프로듀싱을 총괄하는 일이나 뮤직비디오의 활성화, ‘저작권’의 개념을 확립시켰다는 점은 무대의 경계를 떠나 뮤지션으로서 환영할 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방송 출연’이 대중음악으로서의 기반이 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의 큰 인기를 끌어내자 대형 기획사들은 저마다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잘하는’ 음악보다 ‘잘 보이는’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과 ‘잘 하는 것’은 분명 다른 초점이지만, 대중의 객관적 판단은 ‘자본’이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덕분에 처음부터 TV에 관심이 없었던 인디 뮤지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버와 언더의 무형(無形)의 경계를 굳건히 다지게 됐다.

‘Underground’에서 ‘Independence’로
아이러니하게도 방송과 공연장은 이 시기에 큰 폭의 음악적 성장을 겪게 된다. 대중의 인기에 부합하는 가수들이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잡을 때 90년대 중반 홍대 주변에 라이브 클럽들이 생기면서 알려지지 않은 신인들이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밴드 ‘더 문’의 리더 정문식 씨는 인디음악의 경계에 대해 ‘독립 음반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시나위, 부활처럼 대형 신인이 아니더라도 PC통신 동호회 등지에서 음악적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 만나서 밴드를 결성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델리 스파이스’가 대표적이죠. 또 당시 서양 음악시장을 휩쓸고 있던 ‘Nirvana’의 곡을 연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여 결성한 ‘크라잉넛’도 같은 맥락이구요. 그러면서 자연히 소형 독립음반사들이 이들 밴드에 대한 음반 제작을 시도했습니다. 그렇게 나온 첫 독립 음반이 ‘크라잉넛’과 ‘옐로우 키친’이었죠.”

그는 그 이후 한국의 주류 시장을 주도하던 일렉트로닉 댄스음악과 다르게 본인들이 하고 싶은 장르의 음악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앨범을 내는 방식으로 독립음반 제작이 보편화됐다고 했다. 음반 제작에 자본의 힘보다 음악적 성향이 앞서는 것이 어찌보면 대중음악과 인디음악의 큰 차이점일 것이다.

정문식 씨는 음악에 대한 대중의 선택이 아쉽다고 한다. TV, 라디오 등 일방적인 공급으로 인해 대중에게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이 미디어에 끌려가기보다는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다면 음악이 소비성 상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이나 뮤지션의 음악적 성향에 대한 정보를 함께 접한다면 금상첨화. 요(要)는 ‘아는 만큼 들린다’는 것이다.

헤비메탈 신드롬, 크래쉬
1991년 결성된 크래쉬는 1994년 1집 ‘Endless supply of Pain’으로 정식 데뷔하게 된다. 브라질의 헤비메탈 그룹 ‘세풀투라’(Sepultura)의 스레쉬 메탈 스타일로 장식된 이 앨범은 세계적 프로듀서 콜린 리차드슨과 함께 작업한 역작이다. 한국 록 사상 최고의 사운드와 구성으로 대번에 헤비메탈의 대명사가 된 크래쉬의 1집 앨범은 약 8만장이 팔리며 인디음악계의 메이저 그룹이 됐다. 리더 안흥찬은 1집 발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수록곡 ‘교실 이데아’와 ‘내 맘이야’에 백보컬로 참여해 대중의 인지도를 얻기도 했다.

2010년 발매된 크래쉬의 6번째 정규앨범 ‘the Paragon of Animals’는 스레쉬 메탈에 근간을 두고 인더스트리얼 장르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던 전작과 달리 데뷔 초기의 헤비메탈 사운드로 회귀한 최신작이다. 멤버들의 연주 실력과 더불어 첫 곡이자 메인 타이틀 ‘Crashday’부터 마지막 ‘Fierce People’까지 숨가쁘게 달리는 이들의 음악은 시원하다 못해 뜨겁게 들려온다. 무엇보다 원년멤버 기타리스트 윤두병의 복귀로 초창기보다 더욱 진화한 기타 사운드를 선보인다.

이들의 음악이 ‘록’이라는 마이너 리그에서 어떤 진화를 불러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크래쉬의 지난 7년간의 공백기에 대중음악의 흐름은 너무나 상업적으로 변질됐고, 크래쉬의 앨범은 이에 대한 더 큰 반작용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지난 여름 지산 록 페스티벌에서의 그들의 공연은 아직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던 공연이었다. 다음 앨범은 부디 7년보다 덜 기다렸으면 한다.
 

자문 : 정문식, 보컬, 밴드 ‘더 문’(The Mu:n) 리더

2005년 EP 앨범 ‘Launchin' to the Moon’으로 데뷔. 하드록과 모던락을 접목시킨‘Mu:n sound’를 추구하는 록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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