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1981년 1월 25일 - 마오쩌둥의 미망인 ‘장칭’ 반혁명죄로 사형 판결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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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장칭
사진 = 장칭

[피플투데이 정근태 기자] = 장칭은 마오쩌둥과 결혼한 여성으로 중국 공산당의 핵심권력을 잡은 후 문화대혁명을 과격하게 추진한 이였다.

장칭은 1914년 산둥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5세 때 상하이로 이주해 여배우로 성장했고, 이후 수년 간 이혼과 동거의 반복으로 남성편력이 심한 여자로 좋지 못한 소문이 났다. 본명은 리칭원이었는데 일본이 상하이를 공격한 당시 충칭으로 떠나 옌안(延安, Yanan)으로 이주하여 공산당 당원으로 복귀하였고 장칭[江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옌안에서도 그녀는 연극활동을 하였는데 이 때 모택동(마오쩌둥)을 처음 만나게 된다. 두사람은 이를 계기로 친분을 쌓았고 당시 미모의 24세였던 장칭은 45세 마오쩌둥의 마음을 사로잡아 모택동과 결혼을 하기까지 이른다. 다만, 결혼 당시 장칭의 문란했던 남자관계가 알려져 문제가 되었고 당시 공산당 지도자들은 장칭이 향후 30년 동안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 때문에 장칭은 1939년 마오쩌둥과 결혼한 후 루신예술학원 연극예술과 교수를 지내며 마오쩌둥을 내조하는 일 이외에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과도한 중공업 정책으로 국민경제가 몰락하자 모택동은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명분삼아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마오의 부인 장칭과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 이른바 문혁 4인방이 정치 전면에 나섰다.
그녀는 인민복을 몸에 두르고 정치에 뛰어들어 문화혁명 절정기 당시 톈안먼광장에서 150만 홍위병을 사열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1976년 마오가 사망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기대와 달리 마오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은 화궈펑이 덩샤오핑과 손을 잡고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권력의 뒤끝은 허무했다.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반혁명주범으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고 1981년 1월 25일 ‘인민의 적’이라는 죄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당시 장칭은 “나는 마오의 개였다. 그가 물라 하면 물었다”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결국 1983년 종신형으로 감형된 장칭은 인후암에 걸려 교도소 밖 생활을 하던 중 91년 5월 14일 새벽 아무도 없는 가운데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화장된 유골은 딸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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