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Today 인터뷰] 김치헌 '(주)호박패밀리' 대표에게 듣는 성공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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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박패밀리 김치헌 대표
(주)호박패밀리 김치헌 대표

[피플투데이 김은서 기자]= 서울시 중구 약수동에 가면 기이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대로변 인근에 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연예인을 기다리는 팬들인가 싶어 자세히 보면 그들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찬 한 대형식당 안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손님들이다. 손님들의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대기하는 것처럼 일렬로 서 있는 손님들도 있고, 혹은 카운터에 미리 예약을 해놓은 후 식당에서 마련한 벤치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도 있다. 이렇게 한 끼 식사를 하기 위해 적게는 30분에서, 많게는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단골임을 자처하며 기꺼이 그 긴 대기 시간을 감수한다.

이처럼 주말과 휴일 상관없이 줄 서서 들어가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이 곳은, 바로 일본식 불고기인 야키니쿠 전문점, ‘호박식당’이다.

긴 대기 시간을 투자해 식당 입구에 들어서니 우락부락할 정도로 건장한 남성이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반갑게 인사한다.

“어서오십쇼!”

근육질의 우람한 체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손님을 맞는 이는 이 ‘호박식당’의 주인, (주)호박패밀리의 김치헌 대표다. 개업한 지 약 5년 만에 이곳을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맛 집 중 하나로 만든 그의 저력은 가히 대단하다. 그는 36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총 6개의 외식브랜드와 16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호박식당’ 외에도 미국 남부 정통 치킨 스타일을 추구하는 치킨 전문점 ‘the CoCo’, 진짜 한우가 아니면 1억 원을 준다는 한우 곱창 전문식당 ‘순자한우곱창’, 최상급 한우와 와인, 그리고 담소를 즐길 수 있는 한우 숙성 등심 전문점 ‘한와담’, 제주오겹살과 고추장찌개가 일품인 ‘369’, 매운갈비찜을 주메뉴로 내세운 ‘만식이네’.
이렇게 메뉴도 맛도 손님 층도 제각각 다른 이 6개의 외식브랜드는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되었다.

호박식당
호박식당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았던 날들

‘외식업계의 신흥강자’라고 불리며 외식업을 뒤흔들고 있는 그. 웬만한 배포가 아니면 순식간에 여러 브랜드를 런칭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남다른 배경이나 지원 사격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에게 물었다.

“남다른 배경이요? 그런 게 있었다면 더더욱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웃음) 사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었어요. 아버지가 액세서리 사업을 좀 크게 하셨는데 덕분에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죠. 운동 중에선 돈이 꽤 많이 드는 아이스하키를 중학생 때부터 했었던 데다가 한 번도 돈에 전전긍긍해 본 적이 없어서 돈이 없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붉고 탐스러운 꽃이라 해도 열흘을 넘기기 어렵고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가라도 그 권세는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대학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던 1997년에 IMF로 아버지 사업이 무너지게 되었어요. 집안이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내려앉았죠.”

언제까지고 완고해 보이던 그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스르르 허물어졌다. 세상물정 모르던 그는 자연히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등록금을 낼 돈도 없어 장기학자금 대출을 받은 채 대학에 진학한 그는 수업이 끝나면 곧장 돈을 벌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릴 적부터 가장 자신 있던 것이 바로 운동이었기에 헬스장 트레이너, 수영장 안전요원들을 전전하며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군분투했다.


말단직원에서 점장, 그리고 실직자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바쁘게 지냈더니 어느새 대학 생활도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더군요. 대학을 졸업한 후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외식업이 돈을 많이 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죠. 특히 고깃집이 수입이 좋은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제 대학 선배 중에 고깃집을 운영하는 분이 있어서 그 분 밑에 직원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저는 홀서빙과 냉면배달은 기본이고, 가게 문이 닫으면 인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전단지를 붙였죠. 아마 하루에 5시간 정도도 못 잤던 거 같아요. 최저임금도 안 되는 박봉을 받으면서도 밑바닥부터 악착같이 일했어요. 하루는 오토바이로 냉면 배달을 하다가 중앙선을 침범한 택시와 부딪혀 사고가 난 적도 있었죠. 사고가 나던 그 아찔한 순간에도 배달 걱정을 할 정도로 일에 미쳐있었어요.”

이렇게 악착같이 일한 덕분에 그는 말단 직원에서 주방 보조, 주방 보조에서 주방 책임자로 차근차근 한 계단씩 올라갔고 마침내는 점장으로까지 등극하게 되었다. 메뉴 개발과 직원 관리, 인테리어 리뉴얼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그는 더욱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몇 년을 몸 바쳐 일한 곳에서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그의 눈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넘어진 그를 오뚝이처럼 일으킨 것은 바로 아이디어, 그리고 사람

“회의감과 막막함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다른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죠. 그렇게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뭘까’하고 고민하던 저는 수년 간 고깃집에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은 경험을 무기로 저만의 브랜드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면서 쌓은 경험은 고스란히 노하우로 돌아왔죠. 그렇지만 경험과 노하우만 가지고 무작정 제 브랜드를 런칭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무너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죠. 당시 국내에 있던 일반적인 고깃집과는 다른 차별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어요.”

여러 날 고민 끝에 그는 일본식 불고기인 야키니쿠를 떠올리게 되었다. 평소 한식 외에도 세계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키니쿠는 한국의 숯불구이 소고기가 일본에 건너가서 현지화된 음식이었는데 한국의 것과는 만드는 방식부터 먹는 법까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한국의 숯불갈비는 고기와 양념을 함께 재워 숙성해 만든 것인 반면, 야키니쿠는 고기 따로 양념 따로 숙성해서 손님의 테이블에 나가기 직전에 고기에 양념을 버무려 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제조상의 차이로 한국 숯불갈비는 고기 속까지 양념이 잘 배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육즙이 빠져나가서 고기 자체의 순수한 맛이 덜하다는 단점이 있었죠. 그에 비해 야키니쿠는 양념이 속까지 밸 수는 없었지만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아 고기의 선명도나 신선도가 부각되는 장점이 있었어요. 또 일본 정통 야키니쿠는 한국인의 입맛엔 간이 단 편이에요. 그래서 저는 한국인의 선호도에 따라 단 맛을 줄이고 7여 가지의 과일을 넣은 소스를 개발했어요. 그리고 이 소스를 최소 2시간부터 최대 6시간까지 숙성해 깊은 맛을 더했죠. 고기 역시 가장 맛이 좋은 꽃갈비를 주재료로 사용하고 거기에 육향이 진하면서 감칠맛이 강한 참갈비를 사용했어요.”

 나아가 그는 엄선된 소고기를 사용해 재료의 안전성을 더했다. 직접 만든 맛있는 소스에 안전한 재료,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하다면 손님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지 않겠냐며 그가 웃었다. 또한 2009년 당시 국내에는 야키니쿠를 주메뉴로 내세운 식당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선두주자로 나서기에도 충분했다. 혹시라도 야키니쿠를 좋아하지 않는 손님들을 배려해 우리나라 대표음식인 삼겹살과 한국식 돼지갈비 등도 메뉴에 추가해서 대중성과 차별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창업 전 제 수중에는 대학 시절부터 부지런히 일해 모은 6천만 원이 있었어요. 생활비에 보태고 학자금 대출을 갚아 나가면서 모은 갚진 돈이었지만 식당을 차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죠. 사업 자금을 모으기 위해 주류 대출까지 받고 아등바등 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돈이 모여 창업하게 되었어요. 바로 지인들의 도움 덕분이었죠. 어릴 적부터 사람들을 좋아해서 인간관계만큼은 누구보다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몇 천만 원이나 되는 큰 돈들을 턱턱 빌려 주는 지인들을 보면서 ‘아, 내가 이제껏 인생을 잘못 살아오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한 감동 서비스로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오로지 그 하나를 믿고 도와준 주변 지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그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며 웃었다. 그래서 그는 손님들을 만족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감동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님이 원하는 것을 먼저 파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손님에 대한 배려이자 진정한 고객 감동 서비스라는 생각으로, 그는 손님들이 식후 입가심할 무료 슬러시와 커피 기계를 식당 안에 구비해 놓았다. 또한 양치를 원하는 손님들을 대비해 일회용 칫솔까지 상시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감동 서비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손님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고기를 먹을 때 파절임과 함께 먹는 손님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낱 밑반찬으로 여길 수 있는 파절임에도 혁신을 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그는 파절임의 식감을 살리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파를 썰기 시작했다. 기계로 자른 천편일률적인 파절임은 식감이 풍부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나온 그의 과감한 결정이었다. 혁신 그 자체였다. 수작업으로 파를 썰면 그만큼 시간도 느리고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손해가 아니냐는 물음에 그가 답했다.

 “당장 얼마를 손해 볼 순 있지만 손님들의 마음은 잡을 수 있죠. 그렇지만 말이 쉽지 과정은 무척 힘들었어요. 파를 직접 썰다보니 눈이 너무 매워서 눈물이 주룩주룩 났죠. 물안경을 쓰고 파를 썰기도 했어요. 그렇게 지금껏 하다 보니 눈마저도 마비가 됐는지 이제는 파를 많이 썰어도 아무렇지 않아요. 어쩌면 밑반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파절임이었지만 손님들을 감동시키고 싶다는 생각에 파절임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더니, 어느새 저희 식당에 ‘서울에서 파절임이 가장 맛있는 집’이라는 별명이 붙었더라고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어느 식당도 쉽게 실천할 수 없는 그의 ‘무한 감동 서비스’가 빛을 발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박식당’을 한번 와 본 손님들은 그의 서비스에 감동해 빠르게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 역시도 인터넷 블로그와 지인들을 통해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호박식당’은 ‘손님’이라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맛 집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낮이든 밤이든 식당 안은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매장 앞에는 대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감사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제가 어디서 뭘 하든 늘 응원해주던 부모님, 그리고 늘 제 곁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 그리고 창업할 때 제게 선뜻 거액을 빌려줬던 지인들. 생각해 보면 그 분들이 제가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던 거 같아요. 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거든요. 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하며 살았으니까요. ‘호박식당’이 수많은 단골들을 보유하게 된 이후에도 치킨전문점 'the CoCo', 한우 곱창 전문 식당 ‘순자한우곱창’, 한우 숙성 등심 전문점 ‘한와담’, 제주오겹살 전문점 ‘369’, 매운갈비찜 전문점 ‘만식이네’를 런칭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자신의 좌우명은 ‘노력 없이 성공도 없다’라는 그.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말이지만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 바로 ‘노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 남다른 노력이 현재 그를 ‘외식업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게 한 성공 비결임은 의심의 여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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