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조선 찻사발 ‘이도다완’을 마침내 재현해 내다

대한민국 도예명장 천한봉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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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자기 애호가들 사이선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꼽혀
이미 세계 여러 나라 박물관 및 미술관에 작품 전시돼

대한민국 도예명장 95-19호, 무형문화재 32-나호, 대통령 표창, 일본 문화훈장 수훈, 한국 유일의 흑유자기 무형문화제 도천 천한봉 명장과 그의 딸인 무형문화재 전수자 2대 도천 천경희 도예가가 머무르고 있는 문경의 ‘도천 도자미술관’을 찾았다. 2012년 문을 연 도천 도자미술관은 도천 천한봉 명장의 평생의 꿈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자료실, 전시 및 판매 공간, 차실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문경 도자기의 역사와 더불어 찻사발의 이모저모와, 명장과 그의 딸의 무형문화재 작품들을 온전히 감상할 수가 있다.

“천년의 역사 문경도자기의 중심 천한봉 명장, 수백 년 전통 도예기법 되살려내”
 문경도자기는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청자, 분청사기, 백자, 청화백자, 흑유, 갈유 등 다양한 생활도자기가 탄생되던 곳이 바로 문경이다. 예로부터 문경은 질 좋은 흙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해서, 과거엔 문경도자기만 100곳이 넘게 나왔었다. 도자기는 흙과, 불, 그리고 물의 예술로서, 그 어느 하나라도 넘치거나 모자라서도 안 된다. 좋은 흙, 성주봉의 깊고 맑은 석간수, 그리고 소나무로 지핀 불까지 명실공이 문경은 우리나라 찻사발의 본향인 셈이다. 고려와  조선 도공의 명맥을 계승한 전통의 도자기 고장인 문경의 중심에는 한국 유일의 흑유자기 무형문화재 도천 천한봉 명장과 그의 딸 무형문화재 전수자 2대 도천 천경희 도예가가 숨을 쉬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전통의 도예기법을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재창출 낸 장본인이 천한봉 명장으로, 오늘날 문경찻사발 축제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이미 여러 나라의 박물관 및 미술관에 전시돼, 한국 전통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구사일생, 천신만고의 젊은 날”
 명장은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간 선친의 까닭에 동경에서 출생하였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는 곳이 문경으로, 도자기의 고향인 문경이 또한 그의 제 2의 고향이 된 셈이다. 사실 천한봉 명장이 도예를 처음 시작한 것은 먹고 살려는 순수한 계기였다. 열네 살 때 뜻하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 안의 맏이로서 어린 나이에 도자기 공장에 취업할 수밖에 없었던 것. 당시 문경에는 이삼십 여 곳의 도자기 공방이 있었다. 명장 또한 선친처럼 삶이 기구해 6·25 당시 열여덟 새파란 나이에 군번도 없이 육군 8사단에 입대, 끔찍한 전투 중 인민군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도 또 부대에 합류해 이번에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부대에서 그는 또 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그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번이 없어 군대를 나왔다는 이력이나 증거가 없다면서 다시 영장이 나왔던 것. 하는 수 없이 자포자기하듯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때마침 휴전이 되어 그제야 마침내 운명의 굴레 같았던 군으로부터 헤어 나오게 된 것이다.

“일본서 최고로 치는 조선의 찻사발 ‘이도다완’, 명장의 손에서 마침내 최초로 재현되다”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또 다시 도자기의 길을 찾았을 때는 저렴하고 단단한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 제품이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자리였건만 겨우 요강이나 항아리, 화분이나 만들어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 것이었다. 그 고생을 다시금 다 하고 명장은 1974년 커다란 결단을 내리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렇게 1년을 교토의 한 사찰에 칩거하면서 도자기만을 공부한다. 가슴 한 켠에 누가 뭐래도 나는 조선의 도공이라는 결심 하나만이 있었을 뿐, 가진 것도 아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명장은 일본 교토의 한 암자인 대덕사, 국보로 지정된 ‘이도다완’인 ‘대정호찻사발’을 어렵사리 눈 앞에 드디어 마주했을 때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이도다완은 일본의 차인들이 찾아낸 최고의 말차 전용 조선의 찻사발이다. 이 그릇을 본 순간 일본의 차인들은 세상에 이를 뛰어넘는 찻사발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조선의 찻사발은 그렇게 일본 다도의 중추가 되었다.
 천한봉 명장은 대한민국의 도공이라면 바로 이 조선의 찻사발 이도다완을 반드시 재현해 내어야만 한다는 불붙은 사명감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없는 실패 끝에 마침내 이도다완을 국내 최초로 재현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일본의 아사히신문과 NHK방송에서 연이어 취재를 했다. 비로소 도예가 천한봉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현재 일본의 도자기 애호가들은 문경요에서 재현한 천한봉 명장의 찻사발을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꼽는다. 선생은 문경도자기협회를 손수 조직, 초대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명장은 지금도 새벽 2시면 일어나 불을 지피고, 그릇을 빚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의 이 시간이 명장에게는 오로지 일에 집중할 수 있고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모을 수 있는 그 어느 시간보다 좋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명장의 막내딸 2대 도천 천경희 도예가,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및 신지식인에 올라”
 천한봉 명장의 슬하에는 다섯 딸이 있는데, 명장의 맥은 막내딸이자 무형문화재 이수자인 2대 도천 천경희 도예가로 이어졌다. 천경희 도예가는 지난 1991년 처음 아버지로부터 도예를 전수받은 이후, 1996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것을 비롯해 각종 공모전에 입상, 2007년에는 대한민국 신지식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간 국내외 여러 번의 전시회를 거쳐 2010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교토 노무라미술관에서 ‘천한봉, 천경희 부녀 도예전’을 가졌고, 2014년에는 도쿄 게이오백화점에서 또 부녀전을 열었다. 아버지와 딸은 서로 닮아 수상 및 전시는 물론, 학술과 작품 연구·개발에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열과 성의를 다하고 있다.

도천 천한봉

주요 약력
1946 도예입문
1972 문경요 설립
1995 문경대학교 명예교수 역임, 대한민국 명장 선정, 대통령 표창
2005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
2006 경북무형문화재 지정, 대한민국 기능한국인 선정
2008 일본 문화훈장 수훈
2012 도천 도자미술관 건립
현재 한국 폴리텍Ⅵ대학교 명예교수

학술 및 작품 연구·개발
1999 “문경도자기에 관한 연구 논문” 발표
2004 “전통가마 축로기술” 발표
2005 “망댕이 장작가마 소성방법” 발표
2006 전통도자기 소성용 장작가마 특허등록
2007 “그릇과 나의 인생” 저술
2009 도천유약 개발, 특허 등록

국내 90여 회 전시, 해외 130여 회 전시

2대 도천 천경희

주요 약력
1991 문경요 전수
2006 중소기업 우수 기능인 선정
2007 경북무형문화재 전수 장학생, 대한민국 신지식인 선정
2013 창조명인 선정
현 문경요 대표

작품 연구·개발
2006 전통도자기 소성용 장작가마 특허 등록
2007 문경칠기다기세트, 흑유자기 화로 디자인 등록
2009 문경칠기유약 개발, 특허 등록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외 현대미술대전·여성발명대회·국제다구디자인공모전·전국 차도구공모대전·산업디자인대전 등 다수 특선 및 특별상 등 입상, 2012 문경요 천경희 개인전 등 미국·일본·대만·한국 국내외 다수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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