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안전계의 대부. 생명을 살리는 뜨거운 열정

  • 입력 2012.12.03 18:13
  • 기자명 현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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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안전계의 대부. 생명을 살리는 뜨거운 열정
정기택|건설기술 교육원 교수

1995년 6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발생했다. 건물의 균열수가 많이 늘어난 것을 미리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층의 물건을 지하로 옮기는 조치만을 취한 결과로 씻을 수 없는 큰 사건으로 번지게 되었다. 불가 20초 만에 건물의 기둥이 전부 붕괴되어 1,500명가량의 사람들이 건물 속에 매몰되었다. 사망확인 471명, 사망인정 30명으로 사망자의 수가 총 501명에 달했고, 부상자 937명, 실종 6명이라는 심각한 인명피해를 남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우리나라의 안전 불감증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당시 산업안전 공단의 건설담당위원으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조사반장을 맡은 사람이 정기택 교수였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이후에도 지하철7호선 침수사고, 부산구포열차 전복사고, 대구 대백프라자 지하철폭파사고 등의 조사위원을 수행하면서 대형재해의 원인분석과 대책 수립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왔다. 그런 건설공사 안전의 대부가 2012년 국토해양부 소속 건설기술교육원의 교수직으로 부임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교육원들의 가슴속에 새겨주고 있다.

건설한국의 요람, 건설기술교육원

우리나라에 아파트라는 개념이 들어온 것은 1962년이었다. 당시 처음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주목을 받았을 뿐,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준공식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테이프 커팅을 했을 정도로 이슈였지만 8평이라는 좁은 공간과 공동변소, 연탄가스의 환기불편 등의 이유로 서민들이 사는 집으로 치부되어 ‘고층 판자촌’으로 불렸다. 이러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0년에 들어서였다. 당시 완공되었던 한강맨션을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당시 8평 남짓한 아파트와는 차별적으로 최대 55평을 분양함으로서 아파트는 고급화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아파트 시장은 수요보다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는 사태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 배경에 맞게 고층 건물들이 급속도로 세워져나가던 시절이 1970년대다. 많은 건물이 공사에 착수하는 만큼 건설전문직들도 필요로 했고 그 수요도 늘어갔다. 또한 건설 직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도 전문적인 지식을 보다 효율적이고 전문적으로 교육할 기관이 필요해서 생겨난 것이 1978년에 설립된 건설 직업 훈련원이다. 건설부 주도로 비영리 공익 재단법인을 설립한 것이다. 건설 직업 훈련원은 1980년에 들어서 건설기술 교육원으로 그 이름을 개칭하고 건설기술자에 대해 법정직무교육을 개시해 건설기술자들이 의무적으로 교육을 이수하게 하였다.
 얼마 후 사설 건설교육원들이 개설되면서 의무적인 교육은 없어졌지만, 건설기술의 교육에 있어서는 메카로 남아있다. 또 전문 건설기술자의 재교육 뿐 만아니라 해외기술인 교육을 병행함으로 ‘건설기술의 개발촉진과 건설 분야 기술 및 기술 인력양성을 수행함으로서 국내 및 국외의 건설공사의 적정한 시공과 건설업의 안전한 발전에 기여 한다’는 설립목적을 단단히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단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국토해양부 교육기관 평가 최우수기관 선정, 고용노동부 직업훈련평가 A등급 선정, 직업능력개발 우수훈련기관 고용노동부 장관상 수상, 일자리창출지원 대통령상 수상 같은 화려한 경력들이다. 이 건설기술교육원에서 정기택 교수는 2012년 6월 건설공사 안전 분야의 대부로서 건설안전교육의 특화교육 강의를 발령받아 교수직으로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

건설 안전 분야의 개척자
정기택 교수는 건설산업분야의 미다스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1977년 모 건설회사 과장으로 재직할 때에 쿠웨이트 5억불 하우징프로젝트를 수주해 국내 건설산업분야를 해외시장 까지 확대한 경력이 있다. 쿠웨이트의 NHA(National Housing Authority)의 발주에 감리는 미국의 벡테르였다. 국내 건설 시장이 한창 변화하던 중동국가 오일달러 건설시장의 개척기에 앞선 판단력으로 해외시장을 겨냥한 것이다.
 당시 발주자와 감독기관 사이에서 중요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면서도 쿠웨이트 태권도 사범단을 창설해 쿠웨이트 왕궁 담당 수석외교로서 태권도를 통한 민간 외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쿠웨이트한국대사관의 중요시책의 일환이었다. 국가 충정의 일념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그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영태학원에서 석사 19기로 무역론을 수료하면서도 태권도를 연마해 오면서 공인6단의 경지에 있었다. 여담으로 그는 “군 특수부대 훈련에서 무술연마, 공수훈련, 수중폭파, 침투 훈련 경험도 있었습니다”라며 “대학교 후배들은 문무를 두루 갖춘 선배라고 불렀다”라며 수줍게 말했다.
 

한편 그의 능력을 주시하던 청와대에서 경호실 근무를 요청해 새로운 길을 걸을 준비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경호실 근무 준비를 하던 중 1979년 10.26일 사태로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그리고 1982년 다시 찾아온 청와대 입성기회는 영국 유학중 대형 교통사고로 무산되었다. 그는 “청운의 꿈이 날아가서 좌절도 했었다”며 아쉬운 회상을 했다.
 이후 자신의 전공을 살려 광양제철 건설사업 프로젝트의 포항제철 감리부장으로 업무를 총괄 지휘해 그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인정받으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한강개발사업, 목동 개발사업단에 참여해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갔으며 중부고속도로 감리단 및 올림픽대교 준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고, 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안전공단에서 뽑는 기술위원 5인에 선정돼  건설 분야 기술위원으로 14년간 국내 건설산업의 발전에 힘쓰기도 했다. 건설안전국장, 경기북부 기관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2002년에 동화건설 부회장직으로 큰 빛을 발하기도 했다. 경기북부지역에 2,500세대 아파트를 성공적으로 건축하였고, 대외 외교 및 해외사업에 주력해 건설 분야에 대한 협력과 연구, 개발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 사단법인 안전경영과학회 부회장, 대한토목학회 이사, 건설산업연구소 이사장 등 수많은 요직을 완벽하게 거쳐 오면서 건설산업분야의 미다스로 정평이 나게 되었다.
 그가 광양제철의 감리부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건설현장에 특히 요주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바로 안전이었다. 건설현장을 지휘 하면서 직접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사고에 따른 인명피해, 경제적 손실들을 직접 관리해 왔다. 1997년에는 노동부산하의 산업안전 보건공단에서 국장직을 맡으며 건설현장의 사고 조사, 보고 및 대책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 하였다. 그는 앞서 말했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포함해 성수대교 붕괴, 지하철7호선 침수사고, 부산구포열차 전복사고, 대구 대백프라자 지하철폭파사고 등 수 많은 사고를 조사하고 연구해왔다. 삼풍백화점 사고를 일례로 우리나라의 안전 불감증이 화제가 되는 사회에서 안전사고에 대해 미리 예방하기위해 연구하던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2010년에는 시공 중 재해방지, 시공 후 유지관리 등 재해로 인한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인 한국건설재해예방의 회장직을 맡아 안전사고예방에 힘을 쏟아왔다.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가르치고 싶어”

정기택 교수는 현재 건설기술교육원에서 교수로서 건설안전교육을 하고 있다. 1년간 건설현장에서만 해도 사망자가 650명에서 1,000명가량 발생하고 있으며 재해자의 수만 해도 그의 네 배인 4,000명이다. 정 교수는 이 처럼 무참하게 사고를 당하는 산업현장의 고귀한 인력을 한 명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안전, 위생보건을 전담해 교수직을 맡아오고 있다. 그는 “우리 건설현장에서 매해 4,000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몸에 남은 상처도 크지만 다친 후유증으로 인해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경제적 상처도 함께 안고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건설현장의 인적재해는 전투 현장보다 더 강도가 높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입니다. 국가 건설산업동력에 커다란 손실임이 현실입니다. 더욱 슬픈 일은 여러분도 그 4,000명 중 하나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를 만난 이 순간부터는 가슴에 제 정열을 머리에는 제 지식을 가지고 돌아가셔서 안전한 건설을 이뤄냅시다”라며 강의를 열어 사람들에게 안전 의식을 각인시키는 뜨거운 열정을 보였다. 또한 건설 현장을 전장과 비교해 “수많은 위험이라는 복병이 숨어서 호시탐탐 사고라는 저격을 노리고 있다”며 항시 위험을 숙지하고 조심히 움직일 것을 강조 했고 “요즘은 군대에서도 1,000명씩 죽지는 않는다. 건설 현장은 전장보다도 더 위험한 전장이다”라며 뜨거운 열정을 빚어내기도 했다.
 명지대학교 대학원, 한양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로도 18년간 활약해왔던 정기택 교수는 고희의 나이로도 “여전히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는 일은 내 인생의 보람이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살아있는 동안은 대한민국 건설안전에 대해 계속 연구하고 여력이 된다면 개인 연구소를 마련하고 싶다. 또 될 수 있으면 움직이는 동안은 계속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교육에 대한 열정도 보여주었다. 또한 국회 모분과 위원회에도 건설산업안전 정책수립 위원으로서 직 간접으로 활동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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