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물유통업&컨설턴트’ 김희봉 씨 이야기

  • 입력 2012.11.01 12:00
  • 기자명 박정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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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박정례기자가 본 생활풍경,,, 인물 편

‘축산물유통업 & 컨설턴트’ 김희봉 씨 이야기

 
‘웃음처럼 강한 무기는 없다.’고 한다. 햇볕이 세상만물에 이로움을 끼치듯이 함박꽃 같은 웃음은 삶에 행복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무한히 많은 선(善)기능을 수행한다. 같은 맥락에서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상인은 손님을 불러 모으고 그냥 지나치려던 사람의 발길도 되돌아오게 만든다. 오늘 만나는 취재원 김희봉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좋은 일이다. 사람들이 빈번하게 찾아주는 곳은 장사가 잘 되니까. 김희봉씨가 상당한 부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려운 노인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숨은 일꾼일 줄은 미처 몰랐다. “정육점 사장이 노인들에게 할 수 있는 봉사가 뭐지?”하는 궁금증이 잠시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되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소상공인들의 권리의식과 컨설턴트라는 직업
그럼 잠시 김희봉씨가 하는 일을 소개해 본다. 김희봉씨는 ‘정육점’ 세 곳을 직영하며 축산물유통업에 뜻을 둔 사람들에게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전문컨설턴트다. 정육점을 신장개업하는 사람들을 도와 입지선정이며 물량확보 그리고 점포 안에 필수적으로 갖춰야할 각종 장비에 이르기까지 속 시원하게 상담해 주는 일을 한다. 김희봉씨가 이 같은 축산물유통업의 컨설턴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7년 동안 쌓은 그의 튼실한 장사경험 덕분이다.
 잘 알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업종에서 경영 노하우를 쌓아 가맹점을 모집한다거나 컨설턴트로 나서는 일은 IMF 이후 우리의 경제 환경이 급속히 변하면서부터 더욱 친숙한 일이 됐다. 명퇴자들의 창업러시와 함께 서비스 분야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창업 아이디어나 제조기법의 권리를 지키려는 상인들의 의식이 그만큼 신장된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명한 과학자들의 신약개발이나 줄기세포 같은 특정 분야가 아니더라도, 가맹점을 1천여 개를 거느린 ‘B죽 집’이나 ‘K 김밥 집’같은 곳은 이제 가맹점모집사업계의 룰 모델이 되고도 남는다. 대학로에서 죽 집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손님 하나가 찾아와서 “나도 당신처럼 똑같은 죽 장사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B죽 집은 가맹점 모집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 어떤 아이템이든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똑똑한 소상공인들은 자신의 창업 아이디어와 노하우로 가맹점 모집이나 컨설턴트를 꿈꾸는 당찬 마인드를 지니게 되었다.
 김희봉씨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다. 그는 현재 방학동과 쌍문동 그리고 공릉에서 정육점 세 곳을 운영하면서 컨설팅을 겸하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농고를 졸업한 그가 처음부터 ‘축산물유통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기계 다루는 것을 좋아한 김희봉씨는 농고에서도 원예자격증 대신에 ‘농기계 수리 자격증’을 택할 만큼 소박한 농사꾼이 되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계농을 위해서는 농기계수리 자격증은 필수라 싶어서 농기계 쪽을 파고들었던 청년이었다.

청연시절과 상경 그리고 창업과정
농사꾼이 되려는 김희봉씨, 하지만 이런 그의 꿈은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들만 4형제인 집에서 형들은 돈 벌러 일찍이 대처로 나가고 부모 곁에 남은 사람은 막내아들인 ‘희봉’ 뿐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바람에 까까머리 고 3 학생인 ‘희봉’이 졸지에 병간호는 물론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며 병원 모시고 가는 일까지 혼자 떠맡는 신세가 됐다. 이런 처지에서도 ‘희봉’은 가까운 전문대 농과에 적을 두게 된다.
 헌데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두 번째 쓰러지는 데는 두 손 바짝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고등학생 신분을 벗어난 새내기 대학생은 학교를 가려면 병석에 계신 부모님을 두고 집을 나서야 하는 것이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성남에 살던 형님 내외가 귀향을 결정한다. 그리고 비로소 ‘희봉’은 안심하고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희봉이 군에서 제대를 한 것은 23살 때였다. 그런데 제대한 지 15일 만에 가방 하나만 들고 상경을 하게 됐다. 그 이유는 직장만 다니느라 사업(事業)의 사자도 모르던 형님이 더구나 숫기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없으면서 하필이면 IMF 때, 정육점을 덜컥 인수하더니 사업이 곧 망하네 마네 하는 형편이었다. ‘희봉’이 제대 인사 차 들렸다가 ‘나 좀 도와 달라.’는 형님한테 붙들리고 말았다. ‘희봉’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곧 망한다는 형님 가게 내가 한 번 살려보자!’는 결심을 굳힌다. 한 번 온 손님은 반드시 다시 찾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자세로 용감히 go go 했던 것이다.
 막내로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자란 ‘희봉’은 구김살이 없었고 그의 웃음 띤 얼굴은 손님들 앞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침 9시에서 저녁 10시까지 하루 13시간의 성실하고도 고된 노동이 어김없이 뒤따랐다. 이 덕분에 가게를 흑자로 돌리고 효자동에서 창동에 있는 신창시장 쪽으로 확장 이전을 한다. “장사 잘 되면 네 몫으로 가게 하나 차려줄게!”라는 말을 믿고 묵묵히 일만 한 3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원 훈련을 가게 됐다. 사나이들끼리 한마디씩 주고받는 휴식 시간에 누군가 말했다. “남자라면 통장에 2천 만 원 정도는 있어야 하고, 30분 만에 3백 만 원 정도는 금방이라도 융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 후 김희봉씨는 형님 집을 나와서 경기도 광명시로 일자리를 얻어 나갔다. 형님한테 한몫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시작해보자!”는 뜻에서였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집을 나서면 출근하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 집에 오면 밤 12시고. 이런 생활을 1년 동안 계속하며 한 푼도 쓰지 않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신 도봉시장 입구에 가게를 차렸다. 1년 동안 저축한 돈은 장비 마련과 재세공과금을 충당하니까 바닥이 났다. 보증금과 권리금 4500만원과 물건 값은 모조리 빚을 내서 차린 가게였다. 이때부터 ‘희봉’의 뼈를 깎는 고통이 시작됐다. 하루 꼬박 13시간씩 일을 하며 빚을 갚는 생활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의 안정과 숨은 봉사
‘희봉씨’의 나이는 지금 39세다. 결혼한지는 4년 됐다. 그리 빠른 결혼은 아니었다. 사채 빚 다 갚고 자기 이름으로 된 아파트 한 채라도 장만한 연후에 식을 올리려다 보니 그리 됐다. 하지만 가방하나 들고 상경해서 무일푼으로 일군 입지라서 여한은 없다. 그런 강행군이 있었기에 오늘날 직영점을 세 군데나 꾸리면서 ’축산물유통업‘ 분야에서 유능한 컨설턴트가 될 수 있었다. 가족의 생계가 절박한 누군가에게 불필요한 경비를 줄여 알뜰한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최대한 빨리 수익을 내도록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런 일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그 직업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귀하고 천한 것이 결정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고기는 단가가 상당히 높은 식재료이기에 독거노인들이 자주 사먹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러기에 김희봉씨는 어르신들에게 1달에 한 번 씩이나마 순전히 봉사 값에 이를 제공해오고 있다. 이런 일 때문인가? ‘김희봉’씨를 가리켜 사람들은 숨은 봉사자라고 부른다. 미소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39세 김희봉씨다. 3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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