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세계역사를 바꾼 20대 전쟁

  • 입력 2012.10.31 15:57
  • 기자명 조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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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세계역사를 바꾼 20대 전쟁

지난 수천 년 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 대해 “도전과 응전”이라고 설명했듯 인류역사를 전쟁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더불어 그는 “전쟁은 모든 문명을 파괴시키는 주된 요인”이라고 역설하기도 해 전쟁의 해악성에 대해서도 꼬집은 바 있다.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수많은 전쟁들이 있어왔고 그 전쟁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왔다. 본 지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역사의 물길을 뒤바꾼 스무 차례의 큰 전쟁을 돌아보고 그 전쟁이 세계사 속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지를 20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註) 



나이팅게일, 헌신적인 간호 활동 펼치다
러시아 근대화를 촉발시킨 ‘크림전쟁’
‘크림전쟁’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 처음 벌어진 전쟁으로 러시아가 오스만 튀르크,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사르데냐 연합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러시아는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크림전쟁’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이유는 바로 야전병원에서 큰 활약을 보인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참전 때문이다. 나이팅게일의 활약은 간호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여성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연 계기도 됐다.

러시아의 정복욕이 원인이 된 전쟁

크림전쟁은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직접적인 요인이 됐던 것은 러시아가 투르크 제국 내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권 주장이었다.
러시아는 빈회의(1814~1815) 이래로 투르크 영내로의 남하를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3세는 국내 가톨릭의 인기를 얻으려고 투르크의 술탄에게 예루살렘 성지에서의 가톨릭교도의 특권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그리스 정교도의 비호자임을 자처하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나폴레옹3세의 요구에 반발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됐다.
1853년 7월, 러시아가 투르크 제국과의 경계에 있는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들을 점령하자 투르크 제국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강경하게 맞섰다. 1853년 9월 23일에는 영국 함대가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10월 4일, 드디어 투르크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같은 달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투르크 쪽 흑해 해안에 있는 시노페 앞바다에서 투르크 함대를 격파하자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이듬해인 1854년 1월 3일, 투르크의 수송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흑해로 들어왔다.
3월 28일에 이르러 영국과 프랑스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만족시켜 참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에서 철수했지만 1854년 8월, 오스트리아가 이곳을 점령했다.
한 달 뒤인 9월, 연합군이 흑해의 북쪽 해안에 있는 러시아 크림 반도에 상륙해 1년에 걸친 세바스토폴 포위가 시작되었다. 주요전투는 9월 20일 알마강, 10월 25일 발라클라바, 11월 5일 인케르만에서 각각 벌어졌다.
1855년이 되자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도 전쟁에 가담해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의 주요거점인 말라호프를 공격한 지 3일이 지난 1855년 9월 11일, 러시아군은 요새를 폭파하고 함선들을 침몰시킨 뒤 마침내 세바스토폴에서 철수했다. 전쟁의 제2단계는 카프카스와 발트 해에서 전개되었다.


근대전과 현대전의 교차점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 가담하겠다고 위협하자 러시아는 1856년 2월 1일, 예비 강화조약을 받아들였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니콜라이 1세는 전쟁 중인 1855년 2월에 사망했다. 곧이어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에서의 근본적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1856년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됐다. 파리 강화회의는 이 해 2월 25일부터 3월 30일에 걸쳐 최종 타결안을 내놓았다.
크림전쟁에서는 교전국 모두가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않은 데다 지휘 체계가 형편없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크림전쟁이 근대전과 현대전의 교차점에 위치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크림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와 연합군 양측을 합해 약 25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병력이 질병으로 사망했지만 결국 동유럽에서의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해결하지 못했던 불운한 전쟁이었다.
새로 러시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가 유럽 강국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후진성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패전을 계기로 근대화를 지향하는 운동이 일어나, 1861년의 농노해방을 비롯해 일련의 개혁사업이 추진되었다.
크림전쟁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프랑스 편에 가담함으로써 중부 유럽 문제에 대해 러시아의 지지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의지하게 되었으나, 이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1859년과 1866년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이탈리아와 독일은 각각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패배는 연합군과 비교해 열세에 있는 화력 탓도 있었다. 연합군 측은 러시아가 사용했던 활강소총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강선소총을 사용했고 돛을 단 범선이 주력해군이었던 러시아에 비해 연합군은 증기로 움직이는 기선이 주력부대였다. 또 연합군은 최초로 전신을 사용한 통신과 정보 면에서 러시아를 압도했다.
크림전쟁은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활동으로 유명하며 이 전쟁으로부터 앙리 뒤낭은 인도주의를 주창하며 국제적십자를 발족시켰고, 1864년 12개국이 최초로 제네바 협약을 맺기도 했다.

조성기 기자 maarra21@epeople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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