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비워내고서야 조금씩 차오르는 예술의 즐거움”

이민정 기자l승인2012.03.26l수정2012.03.2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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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비워내고서야 조금씩 차오르는 예술의 즐거움”
안명옥 작가

작가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것 말고 다른 것에선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쓴다”고 말했다. 한국화가로서 기존의 틀을 깬 폭넓은 작품으로 왕성하게 해오던 활동을 과감히 접은 뒤 7년 만에 공백을 깨고 재기하기까지 안명옥 작가에게는 ‘그림’의 존재가 그러했다. 고요히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고서 이전과 색다른 작품으로 돌아온 그의 한층 성숙해진 심경의 변화를 들어봤다.

이민정 기자 meua88@epeopletoday.com


“그림은 곧 한편의 시와 같다”

안명옥 작가의 작품을 논하며 이형옥(조형예술학박사) 以形아트센터관장은 “일련의 구상회화로서 표현성과 색채미의 작업을 혼용시켜 한 화면 위에 시각화해 동시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숙련된 테크닉에 의해 효과를 이루며 구성적 밀도감이 숨 가쁜 시간의 삶을 살아온 작가의 정신적 긴장을 느끼게 해주었다”며 “따라서 작금의 미술계에 구상성회화의 표현적 색채미가 확산되는 아이텐디디가 요구되는 시점에 독자적 자적어법을 갖추고 있는 작가가 의외로 빈곤한 우리의 현실에, 新 문화의 자연친화적 인간愛의 한국화가인 그는 우리의 美 感見을 문화 창조로 리드하는 진정한 화가”라고 평했다.
안 작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한 편의 시를 짓는 일과 흡사하다고 한다. 시인 소동파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했고, 화가 곽희는 “시는 무형의 그림이고 그림은 유형의 시다”고 했던 것처럼 안 작가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어휘삼아 시 한편을 짓듯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회화에는 사의(寫意)화법이 있는데, 사물의 형태보다 그 내용과 정신에 치중해 그리는 것을 뜻한다. 즉 화가는 손이 아닌 눈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는 시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고 안 작가는 말하며 이는 사물을 대상적으로 보지 않고 선험적, 사의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
안 작가가 붓을 들 때  가장 역점에 두는 것은 ‘눈 깊은 시인에 의해 냉엄하게 걸러진 시의 어휘’처럼 최대한 간략하게 그러나 더 없이 넓은 세계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이 있고, 소박하고 졸렬하나 깊은 뜻이 스며져 나오도록 하는 것. 그래서 안 작가는 꽃, 새, 별, 달 등 자연의 이미지들을 해체와 조합을 반복하면서 그림에 ‘지극한’ 여운을 담아내고 있다.


옭아매던 그림에서 벗어나 자기성찰을 해내다

안명옥 작가가 처음 한국화를 접하게 된 것은 고교 2학년 무렵 한국화 전공의 미술교과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이다. 형태와 테크닉에 몰두하게 되는 수채화와 달리 동양화는 점 하나를 찍고 선 하나를 그어도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묘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안 작가 역시 거기에 매료돼 한국화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후 안 작가는 평면과 입체 설치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오가며, 한국화라면 지필묵을 당연시 여기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작품을 그려나갔다. 그는 4회의 개인전을 포함해 100여 회 넘는 국내외전시와 대학 강의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돌연 2003년, 40대 중반에 접어들던 때에 그림을 작파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상당한 용기 없이는 선택하지 못했을 길. 하지만 그는 “예술적 욕망에 시달리며 갈등하는 자신에게서 작가로서의 회의감이 느껴졌고 예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서 벗어가기가 힘들었다”며 당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안 작가는 자신에게서 ‘그림’의 존재를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그의 생활패턴과 사고는 그림과 하나가 된 듯했다. 문화센터 등에 다니며 다른 취미를 찾아봤지만 결국 스스로 가장 만족할 수 있는 것은 그림뿐이었다고. 그러면서도 조용히 혼자서 텃밭을 가꾸고 책을 읽으며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지식을 쌓아온 그는 그 당시가 자신에게 있어서는 새롭게 가치관이 정립될 수 있었던 계기라고 회고한다.


‘민화’ 통해 초월적 환상의 세계를 펼치고픈 바람

그러나 역시 안 작가에게서 그림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한 존재.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삶이 주어지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면서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 동안 불안감과 무료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고. 결국 작심하고 다시 붓을 잡은 그는 그림을 작파한 지 7년 만에 화가로서의 삶으로 돌아왔다. “들인 시간에 비해 결과물은 보잘 것 없을 지라도 붓으로 위로받은 지난 세월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작품에 몰입하면서 느끼게 되는 긴장과 이미지와 여백이 만들어내는 지극한 울림을 사랑하기에 다시 붓을 잡게 됐다”는 그는 더 이상 그림과 투쟁하지 않고 그림에 고통당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성취하려는 마음 없이 오직 순수한 즐거움만으로 오랫동안 ‘끝’까지’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고 했다.
미술계에 복귀한지 1년 만에 초대전으로 열린 다섯 번째 개인전에서 안 작가는 다분히 도가적이고 명장상적인 무채색 톤이었던 종전의 그림들과 비교해 상당히 화려하고 강렬해진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는 민화의 형식을 적극 차용한 것으로, 이는 민화 속에 담긴 상징적 의미도 좋지만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해학적 조형미에 흥미를 느껴 여기에 현대적인 기법을 접목시켜 자유로운 화면을 구상한 안 작가의 결과라 하겠다.
선조들이 모란도를 보며 부귀영화를 염원하고 십장생도를 통해 장수와 기복을 바라 듯 민화에는 민중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겨있는데 안 작가가 민화에 천착하는 이유도 그림을 통해 초월적 상상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안명옥 작가는 논어 속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것은 좋아함만 못하고 좋아함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를 언급하며 그림의 경지 역시 ‘즐거움(樂)’에 있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하니 좋아지기도 어렵고, 즐기는 일은 더욱 요원한 일이겠지만 앞으로 삶의 목표만은 ‘즐겁게’ 사는 데 있다”며 “화가로서도 이 경지를 그림에 구현해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은 미학으로 더욱 성숙해진 그가 화단에서 펼쳐낼 세계가 자못 궁금해지는 바이다.
 


이민정 기자  lmj@epeople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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