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1937년 12월 13일, ‘난징대학살’ 시민을 버린 무책임한 사령관 탕셩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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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셩즈 (사진 = 위키백과)
▲탕셩즈 (사진 = 위키백과)
[피플투데이 이재형 기자] =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후 중일 전쟁이 발발하며 일본은 중화민국의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했다.

당시 일본군 수뇌부는 “단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 국민당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군의 막대한 손실을 입고 나서야 어렵게 점령할 수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방향을 바꿔 예정에 없던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공략하고자 진격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군의 이러한 진격에 위협을 느끼고 수도였던 난징을 포기, 충칭을 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이 때 난징의 총사령관이었던 탕셩즈(唐生智)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하며 본인 휘하 15만 명 가량의 중국군을 성 안에 배치해 방어전략을 세우고 버티기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13일, 탕셩즈의 군대는 흐트러진 군내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로 인해 일본군에 손쉽게 공략되며 난징성을 내어주게 된다. 이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전쟁의 혼란속에 언행불일치를 보여주며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갔다. 이 탕셩즈의 무책임한 행동은 지금까지도 존경받지 못할 지휘관으로 언급되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탕셩즈 사령관의 도망으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자 일본군의 학살이 시작됐다. 특히 성에 남아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과 군인은 총 60만명에 달하는데, 일본군은 이들을 포함해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해 닥치는데로 학살했다. 또한 10대 여성부터 70대 여성들까지 가리지 않고 ‘집단 윤간’ 등의 성노리개로 삼았으며 강간후 참혹하게 사살하는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일본군의 이 학살은 6주간 계속되었으며 희생자는 총 30만명으로 집계됐다.

중국은 이 사건을 난징대도살이라 부르며 1985년 난징에 대학살 추모관을 세워 매년 추도식을 열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난징대학살은 중국인이 지어낸 이야기라며 현재까지 이를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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