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관에 입각한 한국근대사 정립에 평생을 바친 원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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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주석의 휘호
▲김구주석의 휘호

[피플투데이 손경숙 기자] = 최근 한·일간의 국교마찰로 양국의 갈등이 고조 되고 있다. 여기에는 양국 간의 뿌리 깊은 역사적 갈등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근대는 아픔과 시련의 농도가 짙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 말 세계정세는 오직 제국과 식민지국의 이분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식민지배의 정당화를 위한 식민사관에 의해 완전히 왜곡되어 통용되어 왔다.
 과거 일제에 의한 ‘거짓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왔다. 대한민국 근대사를 민족사관에 의해 새롭게 정의한 신국주 박사 역시 이들 중 한명이다. 일본에 연합군기자로 주재하며 극비문서로 보관된 근대조선과의 외교문서와 사료들을 파헤쳐 식민사관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현암(玄岩) 신국주 박사를 만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동대신문과 호국단관련 신국주 박사 기사
▲동대신문과 호국단관련 신국주 박사 기사

“나라의 기둥이 되어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일제(日帝)에 맞서『님의 침묵』을 탈고하던 1925년. 이 격동의 시대에 함경북도 명천군의 마설포라 불리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신국주 박사의 역사는 시작됐다. 그의 이름 국주는 나라 국(國)에 기둥 주(柱)로 훗날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부친의 염원(念願)이 담겨있다. 신 박사는 “부친께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저항과 조국의 주권 회복에 대한 염원이 강한 분이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신 박사는 11세까지 부친이 직접 설립한 낙동서당에서 민족정신(民族精神)과 지성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상가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 무렵 일제의 한민족 말살 통치정책에 항거하여 명천농조사건(明川農組事件)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명천군의 10세 이상 학생들은 모두 연행되고 검거 됐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죠.” 우여곡절 끝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신 박사는 학교장의 추천으로 현재의 서울경동중학교의 전신인 경성공립욱구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욱구중학교에는 일본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조선학생은 거의 없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나눠주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는 신찰을 집에 잘 모셔 놓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저는 하숙집에 모실 곳이 없어 방치했다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라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통고 받았습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 사상지배의 일면을 들을 수 있었다. 이후 신 박사는 남경성공학원과 경성상공학교를 거쳐 1945년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신국주 박사의 학위증
▲신국주 박사의 학위증

열혈청년 신국주, 김구 주석으로부터 표창 받다
국가재건에 이바지한 학도 신국주, 건국학생운동공로비 유공자록에 기록되다.

 일본제국의 패전(敗戰)과 함께 대한민국은 광복(光復)했지만 한반도는 또 다시 시련에 빠지게 된다. 수많은 독립운동과 연합국 지위에서 참전을 준비했음에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한반도는 승전국(勝戰國)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연합국은 한반도 신탁통치를 발표했다. 이에 격분한 신국주 박사는 1946년 이철승, 오홍석 등과 전국반탁학생연맹(全國反託學生聯盟)을 결성하여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신박사는 전국적 학생반탁운동을 지휘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공로자 중 학생대표로 김구 주석으로부터 ‘반탁유공학생표창(反託有功學生表彰)과 휘호(揮毫)’를 받았다. 현재 이 표창장과 휘호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상태다.
 1947년 혜화전문학교를 수료한 신 박사는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에 진학한다. 신 박사는 “이 무렵 국내정세는 좌우(左右)의 사상적 대립과 분열로 학원소요(學園騷擾) 사태가 계속되었습니다.”라고 당시의 혼란한 국내정세를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이에 문교부장관은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을 설치했고, 신 박사는 초대 동국대학교 학도대장에 임명되어 학원소요 사태에 앞장섰다. 전국 중앙 학도호국단 의장으로도 선출되어, 전국 38개 대학의 학도호국단을 통솔하며 학원가에서 당시의 좌익학생세력을 배제하고 학원질서를 회복하는데 공헌했다. 또한 신 박사는 역사학도로서 역사의식(歷史意識)을 갖고 대학신문을 발간(發刊)했다. “전국에 있는 대학교 중 최초의 대학신문인 ‘동대신문(東大新聞)’을 발간했습니다. 학도호국단의 활동의 연장선이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깨어있는 의식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제와 신탁통치(信託統治)에 의한 국내정세의 불안 속에서 신 박사와 조국(祖國)의 시련은 계속 됐다. 1950년 남북(南北)으로 갈라져 있던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신 박사는 “당시 일본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저는 유학을 포기하고 조국 수호를 위해 전국학도호국단을 대한학도의용대(大韓學徒義勇隊)로 재편했고, 국방부 정훈국(政訓局)에 소속되어 최고의원으로 제일선에 참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기면서 내무부 치안국 소속의 학도치안대장으로 후방치안을 담당했고, 이 후 국군(國軍)과 같이 평양까지 진격했다. 신 박사는 쟁후(爭後)에도 학도호국대를 이끌며 국가재건에 이바지 했다. 이러한 그의 애국정신과 국가재건의 공훈(功勳)을 기리기 위해 2007년 한국반탁방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가 서울 보라매공원 내에 건국학생운동공로비를 건립하고 유공자록에 이철승(李哲承), 채문식(蔡汶植), 신국주(申國柱)등 26명의 이름을 기록했다.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신국주장학회 설립기념식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신국주장학회 설립기념식

일본유학생,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다

 전쟁과 국가재건(國家再建)에 기여한 신 박사는 동경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일회담(韓日會談) 취재를 위해 평화신문사(平和新聞) 주일특파원(主日特派員) 겸 동경지사장(東京支社長)으로 일본에 가게 된다. 신 박사가 일본에서 활동할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아직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낯선 한국(韓國)이라는 국명보다는 조선(朝鮮)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더구나 조총련(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이 재일교포사회를 장악하고 반한운동(反韓運動)을 전개하던 상황이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바닥이었다. 
“1950년 대 초 일본(日本)은 일제(日帝)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 한국과 한국인을 ‘조선’,‘조선인’으로 호칭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당한 것으로서, 나는 한민족(韓民族)의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고 한국을 올바로 인식시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실제 신 박사는 동경에서 머무는 20년 동안 재일(在日)한국지식인, 학자, 유학생 등을 망라하여 1954년 재일한국학사회를 창립했고, 재일 한국YMCA 상무이사를 역임하며 재일동포들을 위해 10년간 봉사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재일한국 y's협회와 재일한국사회과학자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역임했고, 재일한국교수친목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재일동포에게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일본지식인 및 학회와 우호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민족사관(民族史觀)에 입각(立脚)한 한국근대사(韓國近代史) 정립(定立),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본거지 일본에서 인정받다

 신 박사는 기자로서 한국에 대한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노력하는 한편, 식민사관에 근간을 둔 왜곡된 한국근대사를 객관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관련 학회에 입회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1959년에는 이러한 역사바로잡기 연구 작업을 위해 동경(東京)에서 교수들과 함께 조선사연구회(朝鮮史硏究會)를 창립했다. 또한 1963년 1월부터 국제동방학자회에 10여 년간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1968년 11월에 평의원에 선출된 일본국제정치학회(日本國際政治學會)에는 지금도 참석하고 있다.
“한국근대사 연구는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상 외교기밀로 되어 있어 광복 전까지는 금지됐었고, 오직 일본 사학자만이 한국근대를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공식적인 한국근대사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근거한 거짓 역사였습니다. ‘진짜’의 한국근대사는 없었습니다. 한국근대사 연구를 위한 사료는 일본에만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미군정이 주둔하던 시기였고, 저는 연합군기자 신분이었던 덕분에 한국인에게는 금지된 역사적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었습니다.”
 신 박사는 일본외무성문서과, 궁내성도서관. 국회헌정자료실 등에 보관하고 있는 미공개 일본측 극비문서와 동경서점에서 수집한 1만여 점의 사료(史料)를 분석하고 검토했다. 당시에는 복사기나 휴대용 사진기가 없었기 때문에 신 박사는 이 자료들을 전부 필사로 기록했다. 이러한 노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근대조선외교사연구(近代朝鮮外交史硏究)’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민족사관에 입각한 한국근대사를 재정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사관의 본거지인 일본역사학계에서 이 논문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논문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논문의 근거가 되는 사료가 모두 일본이 보관하고 있던 부정할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만들어 놓은 역사를 일본의 자료를 바탕으로 붕괴시킨 것이다. 이 논문을 계기로 신 박사는 1964년 일본 법정대학(法政大學)에서 일본인 중에서도 최초이자 한국인 최초로 정치학박사(政治學博士) 학위(學位)를 받는다.
 이후 신 박사는 고국으로 귀국하여 한국정치학회, 한국국제정치학회, 국민윤리학회,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등에 입회해 근대조선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며, 다수의 논문을 학회지에 발표했다. 1988년 2월에는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에 선출, 민족사관 정립을 위한 연구와 학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공적탑과 유공자록비
▲공적탑과 유공자록비

지자체 최초의 개인명 도서관인 동작상도국주도서관 개관하다
동국대윤리문화학과 신국주장학회를 설립, 후학들에게 큰 보탬이 되다

 한국에 돌아온 신국주 박사는 후학양성을 위한 교육자의 길로 접어든다. 1964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정년퇴임까지 27년간 봉직(奉職)하면서 근대 한국정치사(韓國政治史)와 외교사(外交史)를 강의했다. 1970년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제 4대 대학원장에 취임을 시작으로 행정대학원장, 이부대학장, 법정대학장을 역임했다. 이후 동국대학교 총장 및 의료원장, 정보산업대학원장을 겸직하면서 대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신박사는 1991년 총장과 교수직을 내려놓고 평통자문위원과 행정자문위원, 건국 50주년기념사업회부회장, 한국동북아세아연구소회장, 자유지성300인회공동대표, 평산신씨한성윤공파도유사, 평산신씨대종중도유사, 아시아태평양공동체고문, 함북친목회회장, 재야구국원로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2009년에는 신 박사가 그간 수집한 한일관계 문헌 8,000여 권을 지역사회에 기증해 도서관을 설립했다. 신 박사는 “늙은이의 욕심이라 치부해도 좋습니다. 제가 일평생 걸어왔던 길이 헛되지 않도록 내 뜻을 계승해줄 학자들과 학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지금껏 소장해 온 많은 책들과 사료, 문헌들을 볼 때마다 꿈을 꿉니다. 내 뒤를 잇는 학자들이 이 책들과 자료들을 유용하게 읽으며 기뻐하는 그런 꿈들을요. 가기 전에 지금껏 소장해 온 많은 책들과 사료, 문헌들을 필요한 곳에 기증하고 싶은 게 지금의 내 가장 큰 바람입니다.” 라고 강조했다.
  책을 기증 받은 지방자치단체는 신 박사의 공로(功勞)와 마음에 대한 보답으로 신박사의 이름을 붙여 도서관의 이름을 ‘동작상도국주도서관(銅雀上道國柱圖書館)’이라 명명했다. 학자가 일평생 모은 자신만의 책을 내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 박사는 후학들을 위해 그 자료를 기꺼이 내주는 대인배이자 진정한 교육자였다. 이 외에도 새로 개관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신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근대한일관계 극비문서와 사료 약600점, 근대 한일관계 문헌 약 3000점과 휘호 70점 등 주요한 사료를 기증하여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부터 감사증서를 받기도 했다. 또한 신박사가 출연한 장학기금으로 ‘동국대윤리문화학과 신국주장학회’를 설립해 후학들이 열심히 공부하는데 큰 보탬을 주고 있다.

▲평산신씨 휘장
▲평산신씨 휘장

▲세계속의 한국인 대상 상패
▲세계속의 한국인 대상 상패


평산신씨대종중도유사(平山申氏大宗中 都有司)로 추대, 평산신씨의 근간(根幹)을 확고히 하는데 노력하다 
 신국주 박사는 한국 역사의 뿌리를 바로잡는데 노력하는 동시에, 자신의 뿌리인 평산신씨(平山申氏)의 근간을 확고히 하는데 노력했다. 신 박사는 평산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30대 후손이다.
 그는 1976년 10월 평산신씨대종중고문(平山申氏大宗中顧問)과 평산신씨 서울특별시 화수회고문(花樹會顧問)으로 활동해 오다 1987년 11월 평산신씨한성윤공파도유사(平山申氏漢城尹公派 都有司(會長))로 선출되어 숙원사업인 한성윤공파 자손록(子孫錄)인 파보(波譜) 수보사업(修譜事業)에 착수, 수보위원장(修譜委員長)으로서 60년 만에 전국종원(全國宗員) 5만여 명을 수록한 평산신씨한성윤공파보 3권(上,中,下) 3700면에 달한 족보를 1995년 5월에 발간하였다.
 평산신씨의 발전에 기여한 신 박사는 2005년 3월 평산신씨대종중 정기총회에서 대종중도유사(회장)로 추대 선출되어 3년간 대종중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가장 먼저 신 박사는 역사학자로서 문화재위원의 입장에서 평산신씨의 시조(始祖)인 신숭겸(申崇謙)장군 묘소(墓所)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기필코 성역화(聖域化)되어야 한다는 신념(信念)을 갖고 있었다. 마침 신숭겸장군 묘소가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되어 있어 당시 강원도지사(江原道知)事)에게 권의 청원하였다. 강원도는 이를 받아 들여 2006년 춘천시의 지원으로 산소진입도로를 포장하고 산소입구에 주차장을 신설해 주었다. 또한 진입도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조(始祖)의 성명을 붙인 신숭겸로(申崇謙路)로 탄생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표석(表石)을 세웠다. 이 외에도 평산신씨의 휘장을 제정하여 평산신씨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자부심을 갖는데 기여했다.

 신국주 박사는 구순(九旬)의 나이에도 대한민국(大韓民國) 그리고 대한국민(大韓國民)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작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과 함께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대한민국이 처해있는 최근 상황을 고려하여 나아갈 방향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동북아시아에 불고 있는 영토분쟁은 새로운 제국주의의 근성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를 대비하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국민의 화합과 단합으로 국가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국가관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장하고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국가에 대한 열정을 토로했다.
 신국주 박사는 민족사관정립에 일평생을 바친 공적과 업적을 인정받아 2013년 제6회 ‘세계 속의 한국인 대상’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발전 공로 부문에 뽑혀 수상했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생채기를 치유하기 위해 90년이라는 시간을 바쳐 왔다. 그의 90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뤄낸 연구와 활동 그리고 후학양성은 대한민국의 ‘새살’이 되어 한반도와 한민족의 발전과 번영에 자존감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신국주 박사 약력>

● 1925년 9월 23일(음) 함경북도 명천 출생

● 동국대학교 문학부 사학과 졸업(문학사)

● 일본 호세이대학 제1법학부 정치학과 졸업(법학사)

●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 졸업(정치학 석사)

● 일본 호세이대학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 1964년 ‘근대 조선 외교사 연구’ 논문으로 일본 호세이대학에서 한일 최초 청치학 박사(제1호) 학위 취득

● 전재학생후생협회 회장, 동국대학학도호국단 초대 학도대장, 전국 중앙학도호국단 의장, 학도호국단 치안대장

● 평화신문사 주일본 특파원 겸 동경지사장

● 재일한국학사회 간사장

● 재일사회과학자협회 회장

●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행정대학원장, 법정대학장, 정보산업대학원장, 의료원장, 총장, 윤리문화학과 교수 역임

●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 평산신씨대종중도유사, 아시아태평양공동체 고문

● 종교사회단체협의회 고문

● 함북친목회 회장

● 한국 동북아세아 연구소 회장,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지성300인회 공동대표, 現 재야구국원로회위원

● 한일 문헌 8천권 기증 지자체 최초의 개인 이름의 도서관인 ‘동작상도국주도서관 개관(2009.10.29)

● 동국대윤리문화학과 신국주장학회 설립(2011.5.14)

● 김국주석으로부터 받은 ‘반탁유공학생표창장’과 휘호 등 70점, 근대 한일관계 극비문서와 문헌 300점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기증(20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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