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선생 흉상 제막식에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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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투데이 선임기자 박정례]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를 아는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6형제 전원과 그 일가족 50명을 이끌고 만주 땅으로 망명을 결행한 분이다. 목적은 오로지 전 재산을 처분한 군자금으로 항일무장투쟁운동을 하여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우당 선생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어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 아닌가?”하고 일갈했던 분이다. 신분과 재산과 인생 모두를 조국의 독립 하나만을 위해서 여한 없이 바친 거룩한 삶이었다.

서릿발 같이 매섭고 일송정 푸른 솔처럼 변치 않는 자주독립운동의 기개를 세운 때가 서른 살 청년 때였다. 이회영 선생은 물었다. “한 번의 젊음을 어찌할 것인가”고. 예순 여섯의 나이로 옥사하기까지의 삶으로 선생은 자신의 물음에 답했다. 몇 대가 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다 바쳐 칼바람 에이는 압록강의 물살을 가르며 국경의 밤을 그렇게 넘었다.  

우당선생은 1905년에 울사늑약 체결의 음모를 저지시키고 무효화 하는 운동을 주도하였고,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주장하여 관철시킨 바 있다. 그러나 헤이그밀사 사건은 실패로 돌아가고 기어코 한일합방이라는 이름하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망명을 떠난다.

우당 이회영선생은 만주 땅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와 더불어 선생이 야심차게 추진한 일은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는 일이었으나 고종황제는 독살되고, 그 여파로 3.1운동이 일어난다. 그러고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우당 선생은 의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과 ‘의열단’ 조직을 지원함과 동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흑색공포단을 산하에 두고 의혈투쟁에 매진한다.

그러나 선생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일경의 추적은 날로 심해진다. 우당선생이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이었다. 일제는 대련에서 우당선생을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한다. 선생은 이곳에서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순국하는데 이때가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올해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82년 되는 해다. 오늘(24일 오후 4시) 비로소 고인의 흉상제막식을 하게 됐다. 이는 우당기념사업회에서 끈질기게 추진한 결과였다.

아나키즘운동과 무장 항일투쟁을 선도했다 하여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엔 자주국방이 없는 독립이라는 것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구호요, 거짓되고 망령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시대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한 상황이 됐다. 이에 홍일식 우당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선생의 흉상제막 건에 대한 예산을 중구청에 요청한다. 오늘 이렇게 우당선생의 흉상 제막이 그 결과다.

참고로 흉상이 세워진 자리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6형제가 태어난 생가 터라고 한다. 명동에 있는 YWCA 건물자리다. 흉상은 건물의 정문 표지석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박유천 광복회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안중현 서울지방보훈청장, 최창식 중구청장, 우당선생의 손자이자 민주당 4선 국회의원인 이종걸 의원과 유족들과 축하객 300여명이 모여와 자리를 빛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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