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중요한 덕목은 먼저 사람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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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투데이 손경숙 발행인]= 세계 각국은 자기나라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을 위인으로 추앙하며 존경을 표한다. 그 나라의 위인을 알려면 그 나라에서 통용되는 지폐를 보면 알 수 있다. 지폐는 그 나라 문화역사의 얼굴이며 많은 정보가 담긴 고용량의 메모리 칩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폐에는 퇴계 이황(1,000원)부터 율곡 이이(5,000원), 세종대왕(만원), 신사임당(5만원) 이 그려져 있다. 지폐에 그려지는 위인의 초상화는 지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오랫동안 국민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지폐에 그려진 인물의 의미만큼이나 지폐 초상화를 그린 화가의 위상도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현재 통용되는 4종류의 지폐 가운데 절반의 두 분 인물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 그가 바로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다. 이 화백은 5천원권 율곡의 화폐영정을 37세에, 그 모친인 5만원권의 신사임당의 화폐영정을 74세에 두 번 씩이나 화폐영정을 그린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화백은 ‘최초’, ‘최연소’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닐 만큼 최고 화가의 반열에 올라있다. 이 화백에 붙은 첫 ‘최연소’는 국전 추천작가 반열의 입성이다. 당시 추천작가 평균 연녕이 41세 때, 그의 나이 불과 23세 때였다. 그는 60년대, 최초로 고구려벽화연구를 통한 ‘한국벽화연구소’의 개설과 ‘독도’를 그리며 ‘독도문화 심기 운동’에도 앞장서는 등 30, 40년 앞의 미래를 예견하는 혜안을 가진 최고 화가로서의 명성에 걸맞은 나라사랑의 문화활동을 해왔다.
 

최고 화가로서 그의 ‘멘토’는 부모님
 이 화백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부족한 것 없이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고암이응로 선생을 따르며 화가의 꿈을 키웠지만 그 시절, 대개의 유복한 가정이 그랬듯이 입신양명을 바랬던 집안의 완고함에 화가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 화백의 아버지는 이 화백의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화가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화백이 3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매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와 제가 그림을 그리고 돌아오면 동네사람들은 아버지가 그린 그림보다 제가 그린 그림을 더 좋아하여 얻어가곤 했습니다. 그때가 5살 정도로 기억하는데 이미 그때부터 아버지는 저의 그림 소질을 알아보셨습니다.”
지금이야 조기 교육이 보편화 돼있지만 이 화백의 어린 시절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 화백의 아버지는 아들을 큰 화가로 키워내기 위해 집 앞마당의 울안에 칠면조, 거위, 금계와 같은 많은 동물들을 기르며 5살 밖에 안 된 어린 아들에게 움직이는 동물들을 속사(速寫;크로키)하게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움직이는 동물들을 그리며 창의력을 키울 수 있었고 아버지의 헌신적인 뒷받침은 오늘날 대가로서의 명성을 쌓는데 밑거름이 됐다.
이 화백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림만 잘 그리는 편협한 화가가 아닌 인성과 재능을 겸비한 화가 되길 바라셨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성을 갖추는 데 필요한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인과학과 문학적인 조언을 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받아낼 것인가를 기대하지 마라. 오히려 내가 그 사람에게 먼저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라.”
 

 
이렇듯 이 화백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람들에게 가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값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다.
보통 우리네 어머니는 학교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하면 “딴 짓하지 말고 공부하라”며 핀잔을 주고 어린 자식의 소질을 피워보기도 전에 꺾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이 화백의 어머니는 아버지만큼이나 아들의 그림에 대한 소질을 알아보시고 소질을 키우는데 힘을 북돋아주셨다.
이 화백이 어려서 친구들과 함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만화책을 베끼고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으면 친구들 부모님은 “넌 공부는 않고 종일 그림이나 그리냐”며 가서 공부하라고 호통 치시곤 했지만 이 화백의 어머니는 달랐다.
“종상아 너는 하루 종일 엎드려서 ‘그림공부’만 하니 지루하지도 않니?”
어린 이 화백은 어머니의 ‘그림공부’란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철이 들 때까지도 잘 몰랐다. 그러나 이 화백이 성장해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며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겨보면 어머니의 이 한마디가 실기와 이론을 겸장한 지금의 이 화백을 있게 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어머니는 이 화백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 노는 것이 아니라 실기와 이론이 하나로 ‘그림공부’라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이해 해주시고 암시 해 주신 분이다. 지금도 이 화백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고 있어 가장 이론과 실기를 겸장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자생문화탐구의 역사 섭렵은 물론, 신벽화 연구와, 유, 무기화학은 물론, 고등 수학과 건축 투시학을 비롯하여 석사과정에서 동서비교미학을 공부하고, 박사과정에서 동양의 기철학을 공부하며 한국최초로 현역화가 제 1호 인문학 척학박사 학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공부에 대한 열정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 “부모님은 자식보다 앞서 가시지만 자식은 그 말씀을 관까지 품고 간다”는 그의 말을 많은 어버이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인지 이 화백은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본적인 예절부터 말씨와 몸에 배어있는 습관, 그리고 성품까지 부모의 보이지 않는 교육이 자식의 일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한다. 모든 부모님들이 자녀의 장래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경청해볼 일이다.
 
 

미래를 보고 진로를 정해준 교장선생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이종상 화백에게 6.25 전쟁은 인생의 전환점이자 위기가 됐다. 민족의 비극은 이 화백에게도 견디기 힘든 시련으로 다가왔다. 전쟁 통에 이 화백은 가족과 헤어져 서울에 미아로 홀로 남게 되고 굴다리 밑에서 걸인행각까지 해야했던 전란의 와중에서 다행히도 어머니와 형을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만난다. 그러나 이미 화가의 꿈을 키워주신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였고 남은 재산도 다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대전에서 어머니는 광주리장사를 하시고, 후에 삼성 제일제당의 사장(이종규)을 지내셨던 형은 다니던 경복중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을 다니며 생활비와 이 화백의 학비를 뒷바라지했다. 이 화백은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다니게 됐지만 유복했던 유년시절과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더 이상 화가의 꿈을 가지고 그림만 그릴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 화백은 화가의 꿈을 접고 이과반에서 서울대 건축과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비록 화가의 꿈은 접었지만, 당시에는 완선된 건축 엘레베이션을 요즘처럼 3D파일이 아닌 수채화로 그렸기 때문에 건축전공을 하면 화가의 소질을 맘껏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그림은 특별활동으로 미술부에서 써클활동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화가의 꿈을 뒤로하고 이과반에서 공부에 매진하던 고등학교 시절 이 화백에게 또 한분의 인생 스승을 만나게 된다. 교육학박사이신 박관수 교장선생님과의 만남은 또 한 번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 계기가 됐다,
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박 교장은 미술부에 자신의 두상을 만들 것을 과제로 주었고 이 화백이 박 교장의 조소작품 두상을 고 2 때, 만들게 된 것이 인연이 됐다. 이 화백이 만든 두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교장선생님은 이 화백에게 미대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이 화백이 기억하는 박 교장은 이 화백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도 재능을 보이는 분야로 진학할 것을 권유하는 교육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셨다. 전쟁직후 경제적으로 어렵고 당시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명문 고등학교에서 이러한 교장선생님의 교육 방침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아주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박 교장은 50년 전에 이미 “취미가 직업이 되는 시대의 도래”에 대한 예지와 혜안을 가졌던 것이다.
“앞으로는 취미가 직업이 되는 사회가 오고,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사회에 주인이 되는 시대가 와야 고부가 창출을 할 수 있는 것이니 제군들은 꿈을 가지고 준비하라. 나는 없는 박봉에도 내 여식이 미술을 좋아하여 독일에 미학공부를 위해 유학을 보냈다” 바로 그 여식이 오늘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하고 한국큐레이터협회 이사장으로 한국 미술평론 기획을 이끌어가는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원로 박래경씨다. 바로, 박 교장선생님의 또 한 분의 애제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며, 이종상의 입학금을 대주셨고 주례까지 서주신 분이다..
결국 교장선생님의 권유대로 이 화백은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기를 결심한다. 교장선생님의 선견지명이었을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현실이 됐다. 박관수 박사의 말씀대로 이종상 화백은 최고의 화가로 최연소 국전추천작가와 2004년도에 대한민국예술원회원으로 입성, 우리 화단의 대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회사후소(繪事後素)’는 삶의 금과옥조(金科玉條)
 이종상 화백은 아름다움을 공자가 말한 회사후소(繪事後素)로 설명한다. 회사후소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칠한 뒤에 그리는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아름다움은 인품의 바탕에서부터 나온다”라는 말로 공자가 제자인 자로에게 가르침을 준 말이다.
이 화백은 “그림은 사람이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속마음이 먼저 갖추어져야 훌륭한 작품을 그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품이 곧 작품”이라는 뜻이다. 어디 그림뿐이랴. 다른 전공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큰 교훈을 주는 말이다. 진정한 아름다움(美)은 참(眞)되고 착한(善)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 서양에는 찾아보기 힘든 공자의 예술윤리학이다.
 “화가의 그림은 그것을 그리는 작가의 인품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사람의 마음, 사람됨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 화백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기법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정직한 마음과 바르고 곧은 성품과 인격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가 아름다운 사람이기에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화백은 최고의 화가로서 그림에 담겨있는 기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마음과 성품과 인격, 곧 사람 됨됨이를 강조했다. 그리고 지금의 아름다운 사람 이종상 화백을 만든 것은 그의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아내와 가족, 그밖에 많은 스승뿐만 아니라 그 동안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다.
“저에게 선과 악은 다 스승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 스승님이 많은 겁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훌륭한 분들이 제 주변에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사람들의 선함과 악함 모두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선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날 때는 ”나는 저렇게 하면 않되겠지“하며 분별지심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제 스승입니다. 그림의 사의(寫意)는 미와 추에서 함께 발견되며, 부부 해로는 고운정과 미운정이 하나임을 깨달아야 가능한 신의 축복입니다. 이것이 제가 아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이며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입니다.”
이 화백이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 모두 이 화백의 스승이 됐고 현재 최고 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자양분이 됐다. 그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스승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화백이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정말로 의외일 뿐만이 아니라 귀감이 될 만한 일이다. 이 화백은 많은 사람들이 수준 높은 학습과 기술을 배우는데 그쳐 단순 지식을 쌓기 전에 먼저 바른 인격과 성품을 가진 사람을 만든 교육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술도 유시(幼時)에 화기(畵技)를 익히다가 청년기에 화법(畵法)을 배우고, 장년기엔 화론(畵論)을 섭렵하여 노년기에 이르면 모두를 벗어던지고 화결(畵訣)을 스스로 터득(攄得)하고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술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급변할수록 우리 사회에는 그 만큼 부작용도 많이 나타난다. 이 화백이 꿈꾸는 이상향은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필요로 하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춘 사람도 중요하지만 먼저 사람 됨됨이를 갖추는 인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화백의 말처럼 새해는 우리 사회가 ‘된 사람’이 주인이 되는 사회가 오기를 밝아오는 갑오년 말띠 해를 맞으며 우리 함께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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