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저 화폭에 수놓는 붉은 열정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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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일대기를 통해 인간의 모습과 내 삶의 모습을 본다”
서리 낀 장미 Oil on canvas 130x130cm 2006
서리 낀 장미 Oil on canvas 130x130cm 2006

한여름, 수직으로 내리쬐는 햇볕과는 반대로 하늘을 향해 맑고 투명한 잎새를 피워내는 장미의 생명력에 매료되어 30년을 장미를 그려왔다. 빛에 의해 보여지는 오묘한 색깔의 얇은 꽃잎들은 마치 잡을 수 없는 나비의 날개처럼 안타깝고 가련하였고, 각각의 형태를 가지고 제각기의 방향으로 피어있는 장미들은 세상을 느끼게 하였다. 그것은 마치 높은 빌딩에서 내려다 보는 사람들의 삶처럼 넓은 장미 벌판의 장미들은 삶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때에 장미는 내 자신이 되기도 하고, 나의 가족이, 친구가. 이웃의 산 사람의 모습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누구하나 같지 않게 특별히 창조된 인간의 모습처럼 어느 송이 하나도 같지 않는 장미의 군집, 순간의 사진 속에 담긴 한 사람의 표정, 그 표정 속에 녹아든 그 사람의 인생, 쉼 없이 피고 지는 장미의 모습 속에 인간의 모습과 내 삶의 모습을 본다.

어느 여름날 장미원에서
-이길순 작가(작가노트)-

[피플투데이 최종구 기자] =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ephine de Beauharnais)는 나폴레옹과 이혼 후 파리 근교의 말메종 궁전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장미를 무척 좋아했던 그녀는 250 종류의 장미를 말메종 궁전의 뜰에 심었다고 한다. 스스로 장미를 채집하러 다니기도 했으며 자신이 모은 모든 장미를 식물화가인 르두테에게 그리게 하여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52살에 나이로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장미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가 왜 장미를 좋아했는지는 역사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그녀가 장미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이를 통해 나폴레옹에게 버림받았던 자신의 사랑을 대신 채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듯 장미는 예부터 미와 사랑, 기쁨과 청춘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만인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이길순 화가는 이러한 만인의 사랑을 받는 장미를 커다란 화면 가득 담아내어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그녀 역시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그랬던 것처럼 장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30년간 영국, 프랑스 등 유럽각지의 장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국내에 머무는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장미원에서 보내며 장미를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자료1]장미의 초상 Oil on canvas 130.3x162.2cm 1999
[자료1]장미의 초상 Oil on canvas 130.3x162.2cm 1999

 그녀의 작품 <서리낀 장미/2006>은 장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장미를 그리는 여러 다른 화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늦가을 새벽녘에 한시적으로만 볼 수 있는 서리낀 장미를 이 화가는 놓치지 않았다.
“사계절에 맞는 다양한 장미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겨울장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었죠. 하얀장미를 하기도 그렇고 흑장미로 표현하기에도 무엇인가 역부족이었어요. 그러다 추운 날 새벽 장미원에 갔을 때 장미에 서리가 껴있는 것이 생각났어요. 그때부터 서리낀 장미를 표현하기 시작했죠.”
 가녀린 꽃잎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서릿발은 차가우면서도 영롱하고 무채색의 서리에 대비된 붉은 꽃잎은 오히려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서리가 낀 이 한 송이를 표현하기 위해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는 장미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화가에게 장미의 매력에 대해 묻자 그녀는 ‘첫사랑’이라고 말한다.
“지난 30년 간 장미만을 고집했지만 전혀 싫증나지 않았어요. 장미를 접할 때 마다 느끼는 새로운 설렘과 기대는 마치 첫사랑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매번 장미를 만날 때마다 나는 첫사랑을 만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이 화가는 장미를 단순한 관찰대상로만 보지 않는다. 이 화가가 그린 장미그림은 곧 그녀 자신을 일대기를 나타낸다. 붉은장미, 흰장미, 분홍빛장미 등 여러 다양한 장미그림 모두가 이 작가 자신의 자화상인 것이다. 이 화가의 작품 ‘장미의 초상’은 커다란 캔버스에 장미 한 송이를 엄청난 크기로 확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자료1]에 나타난 1999년 작 장미의 초상은 지금까지 그려왔던 자신의 (장미에 비유한)모습들을 한데에 모아 나타낸 것이다.
“색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어쨌든 그것은 장미에요. 나 역시도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나란 존재는 하나의 나 일 뿐이죠.”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듯 이 화가와 장미는 관찰자와 관찰물의 관계를 넘어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화가는 장미를 닮아있었고 그녀의 분위기는 진한 장미향마저 내뿜고 있었다.

 30년 화업 평생 장미만을 고집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장미원에서 보내던 이 화가. 그녀에게 요즘 장미만큼이나 열정을 쏟는 일이 있다.
 이 화가는 2013년, 대한민국회화제 대표라는 중책을 맡아 임기가 끝나는 올해 말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여성작가로는 최초로 대한민국회화제 수장에 오른 만큼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부담감 역시 크다고 고백했다. 이번 26회 전시회를 위해 전시장을 선정하는 일부터 참가자들의 심사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 지휘하며 대표로서의 책임감 있는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5월에 열리는 이 화가의 개인전 역시 많은 이들의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2011년 이후 2년만에 관객들을 찾게 될 이번 개인전은 이 화가의 그간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음은 물론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화가는 올 11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회화제를 끝으로 2년 간 맡아온 대한민국 회화제 대표직을 내려놓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후의 활동에 대해 묻자 “그동안 많은 일들 때문에 예전처럼 작품 활동에 활발하지 못했다”며 장미를 찾아다니며 작품을 구상할 것이라 말한다. 나비가 꽃을 찾는 자연의 이치처럼 이 화가 역시 장미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매번 첫사랑과 만나는 설렘으로 장미를 대한다는 이길순 화가의 작품세계는 ‘열정’ 그 자체로 앞으로 그의 화업은 시들지 영원함의 상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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