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 칼럼] 범종 연재에 즈음하여 마음이 비장해지다

  • 입력 2024.03.25 20:09
  • 기자명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천흥사 범종 조사하는 모습
▲ 천흥사 범종 조사하는 모습

80 평생 노력하여 비로소 <한국종>의 실상을 완벽히 파악하게 되어 글을 쓰면서 비장한 마음이 든다. 그 전체를 새로이 밝히게 되어 글을 쓰고 있지만 한편 두려운 마음이다. 한국 범종의 실상은 매우 고차원의 절대적 진리가 담겨 있으나 그 내용을 말하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선학들의 범종에 관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으나 올바르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 혹 저항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학의 연구가 있어서 범종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고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그런 글을 읽으면서 내 연구의 좌표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학 퇴임 후에 나의 새로운 연구가 시작하여 지금까지 25년 동안 지속하여 상승 곡선을 지으며 성과가 축적하여 오고 있으며 지난해 국악방송에서 행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에 관한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궁극적 진리를 깨치게 되었다. 그 이후 범종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세계 최초로 <문자언어>에 상대하는 <조형언어>의 문법을 찾게 되어 조형언어의 존재를 밝히게 되었다. 바로 그 조형언어로 한국 범종은 물론 전 세계의 미술품 일체를 해독하게 되었으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혁명이 아닌가. 그리고 그 조형언어의 존재와 문법과 전개가 바로 신종에서 비롯하였으니 비장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 보주곽과 상대 문양

국립경주박물관 근무를 자원하여 서울을 떠나 경주에 도착한 것이 2070년 11월이었다. 대학의 미술사학과를 다닌 것도 아니라 한국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흙바람 이는 경주에 짐을 풀고 조선 시대 객사(客舍) 작은 옛 건물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책도 없고 선생도 없이 30세였던 나에게 주어진 것은 유적과 고대 작품들뿐이었다. 역시 객사에 따른 작은 한옥 건물이라 협소한 공간 안에 우람한 성덕대왕신종이 걸려 있었다. 그 당시 물론 그 범종의 문양조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당시의 나의 상태가 어땠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경주 생활 15년에 나의 학문적 운명을 가른 것은, 귀면와(鬼面瓦)를 용면와(龍面瓦)로 이름만 바꾼 것뿐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야 서울에서 용의 입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것이 비로소 보였고 그것을 지금까지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15년 동안 경주지방의 유적을 답사하고, 전반적으로 작품들을 관찰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연구는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성덕대왕신종만 하더라도 경주 생활 15년에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동해에서 해가 뜰 때에 신종의 모든 문양이 또렷하게 보였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문양이 하나둘 해독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벽화 연구하는 과정을 기다려야 했다. 최근 15여 년 동안 하대와 상대, 그리고 보주곽의 문제를 풀어내고 내 일은 끝냈다고 확신했다. 이런 작업을 하는 동안 <보주>에 관한 연구는 점점 깊어져 가면서 작품들을 보는 시각과 사고방식이 달라졌다. 매일 매일 나의 시각과 사고방식은 인식의 심도와 강도가 깊어 갔기 때문이다. 

▲ 보주곽의 보주들

2023년 봄, 국악방송국에서 한 시간 동안 내 인생과 학문에 관한 대담이 있었고, 이어서 30분 강의가 있었다. 그때 과감히 성덕대왕신종을 선택하여 최선을 다해 이야기했다. 그 강연을 준비할 때, 처음으로 그동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처음으로 강의했고, 그것으로 20분간의 유튜브가 만들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용의 입에서 거대한 종신(鐘身)이 나오는데 그 종신이 바로 거대한 타원체 보주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신종의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다른 더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 하나하나 밝힐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까 평생 신종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  

지금 뒤돌아보면, 범종 연구는 2007년에서 2010년까지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 고구려 무덤 벽화를 해독해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을 때, 수강생들 몇 명이 모여 <조형해석학회>를 만들어 범종을 연구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는 통일신라 범종과 고려, 조선시대 범종의 문양을 연구했다. 몇 사람 그림 솜씨 좋은 몇 사람이 문양의 밑그림을 그리면 그것으로 모두 채색분석하며 토론했다. 다섯 명 쯤 되었으나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었으며, 함께 전국 유명 사찰을 답사하며 건축도 조사하고, 범종도 조사했다. 그 당시 모임에서 상당한 양의 범종을 연구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성덕대왕신종의 실상에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그런 모임 이전에 내가 신종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 보주가 떨어진 자국, 보주가 떨어진 자리가 중요하다.

 

아래의 글은 1996년 11월 22일 경주박물관·고촌재단·종근당 주최로 개최된 「성덕대왕 신종-국제학술대회」에 발표된 내용을 그 당시 박물관 신문에 발췌하여 쓴 글이다.

 

Ⅰ.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정치적, 종교적 위치(位置)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전체의 아름다운 윤곽선, 견대(肩帶)와 구연부(口緣部)의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 유곽(乳廓)의 연꽃 유두(乳頭), 명문(銘文)을 향하여 마주한 비천상(飛天像)들, 연꽃무늬 당좌(撞座) 팔능형(八稜形)의 종구(鍾口), 힘차고 우람한 용뉴, 연꽃으로 장식된 음관(音管) 등, 화려하고 정교하고 유려한 장식들로 종신(鍾身)이 장엄(莊嚴)되어 있다. 우람하고 아름다운 종신(鍾身)에 어울리게 종(鍾)소리도 우렁차고 여운이 길어,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으뜸가는 예술품(藝術品)이자 악기(樂器)라 하겠다.

높이는 3m33㎝(종신고(鍾身高)), 구경(口徑)2m27㎝, 종명(鍾銘)은 혜공왕(惠恭王) 때의 한림랑(翰林郞) 김필해(金弼奚)가 썼다. 이 종은 효성왕(孝成王)의 2년(738) 부왕(父王) 성덕왕(聖德王)의 원찰(原刹)로 지어진 봉덕사(奉德寺)에 있던 것이다. 동생 경덕왕(景德王)이 역시 부왕(父王)인 성덕왕(聖德王)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대종(大鍾)을 만들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혜공왕(惠恭王) 7년(AD. 771년) 33년 만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신종(神鍾)의 주조에는 우선 정치적(政治的) 목적이 있었다. 경덕왕(景德王)은 새로운 귀족(貴族) 세력의 부상으로 흔들리게 된 중앙집권적 왕권(王權)의 강화를 위하여 관제 정비와 개혁조치를 취하였다. 그러한 대세(大勢)에서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성덕왕(聖德王)의 위업을 기리고 왕권(王權)확립을 다짐하기 위하여 경덕왕(景德王)은 신종(神鍾)을 계획한 것이다.

물론 종명(鍾銘)의 첫머리에 밝혀진 것처럼 종교적(宗敎的) 목적(目的)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명문(銘文)에 보면「신기(神器)」, 「보문(普門)의 청향(淸響)」, 「무설(無說)의 법연(法筵)」, 「일승(一乘)의 진경(眞境)」, 「천종(天鍾)」, 「진기(珍器)의 얼굴 이루어 능히 마귀(魔鬼)를 항복케 하고」, 「圓은 신체(神體)로 비었고 방(方)함은 성(聖)을 나타냄이라」 등의 문구(文句)에서 순수한 종교적인 원대한 발원(發願)을 확인해 볼 수 있다.

▲ 용뉴와 음관

Ⅱ.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미술사적(美術사的) 위치(位置)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주조가 봉덕사(奉德寺)에서 발원되고 있었을 때, 이미 토함산(吐含山)에서 석굴암(石窟庵, 원래 석불사(石佛寺)과 불국사(佛國寺)가 진행되고 있었고, 황룡사대종(皇龍寺大鍾)과 분황사대불(芬皇寺大佛)이 완성된 때였다. 경덕왕대(景德王代)는 우리나라의 예술적 여러 장르에 있어서 모든 문물제도(文物制度)의 전형(典型)을 확립한 위대한 시대였다.

①석굴암(石窟庵)도 신종(神鍾)과 마찬가지로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시작하여 혜공왕대(惠恭王代) 거의 같은 시기에 완성되었다. 석굴암(石窟庵)의 주존(主尊)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석가여래성도상(釋迦如來成道像)은 고려(高麗)를 거쳐 조선시대(朝鮮時代) 그리고 지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불상 예배 대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②경덕왕대(景德王代)에 화엄경(華嚴經)의 비로자나(毘盧遮那)가 형상화되어 동아(東亞)에서 가장 먼저 여래형(如來形)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지리산 천왕봉 석남사(石南寺)에서 조성(造成)되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석가여래(釋迦如來)와 함께 우리나라 造佛의 주류(主流)를 이루어 왔다. ③불국사(佛國寺)를 지음으로써 대웅전(大雄殿), 극락전(極樂殿), 비로전(毘盧殿), 관음전(觀音殿) 등 여러 전각(殿閣)이 병치구성(幷置構成)된, 가람 제도가 확립되어 한국 사찰 전각 구성의 원형(原型)을 이루었다. ④불국사(佛國寺) 석가탑(釋迦塔)이 가장 쾌적한 비례(比例)에 의한 전형적 석탑(石塔)으로 조성된 이래, 그것을 모델로 삼아 모든 시대의 석탑(石塔)이 조영되었다. ⑤능묘(陵墓)에 십이지호석(十二支護石)과 난순과, 문무인석(文武人石)이 갖추어져 능묘제도(陵墓制度)가 확립되었으며 조선에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왕성한 창조적(創造的),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조형예술품(造形藝術品)의 조성에 힘입어 위대한 예술품이자 악기인 신종(神鍾)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종(神鍾)은 첫째, 의식용(儀式用)이란 불구(佛具)로서 공예품(工藝品)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둘째, 조각적(彫刻的)인 면도 강하다. 보상화문(寶相華文)과 연화문(蓮華文)의 부조(浮彫)는 그 당시 흔히 있는 것이지만 용뉴의 힘찬 용트림은 우리나라 용 조각(龍彫刻)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다. 즉 공예적(工藝的) 요소와 조각적(彫刻的) 요소가 같은 비중(比重)을 지니면서 조성된 하나의 새로운 장르이다. 셋째, 불교의 궁극인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이란 진리를 소리로 들리게 하여 중생을 깨치게 하려는 종교적(宗敎的) 염원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 넷째, 그러한 원음(圓音)을 내기 위하여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음관(音管)이 고안되었다. 다섯째, 이러한 대종(大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주조기술(鑄造技術)이 최고도로 발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신종(神鐘)은 정치적(政治的)인 왕권(王權) 강화의 강력한 의지의 발로를 발판으로 하여 공예(工藝), 조각(彫刻), 종교(宗敎), 교리(敎理), 과학(科學) 기술(技術)등 각 분야가 최고조로 발달하여 서로 유기적 관계를 지니면서 만들어진 대종합(大綜合)의 예술품이다.

▲ 용과 보주

Ⅲ. 성덕대왕신종의 교리사적(敎理史的) 위치

신종(神鍾)이 불교미술(佛敎美術)의 종합(綜合)인 만큼 그 배후의 종교적(宗敎的) 상징(象徵)이 종명(鐘銘)의 서두(序頭)에 강력히 표명되어 있다. 즉 신종주조(神鐘鑄造)의 제 일의적(第一義的) 목적은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었다.

『법화경(法華經)』 제일(第一)「방편품(方便品)」에 "시방불토(十方佛土) 가운데 오직 일승(一乘)만이 있지만, 방편(方便)으로써 분별(分別)하여 삼승(三乘)으로 설법한다"라 했고, 『구화엄경(舊華嚴經)』 제오(第五)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에 "일체의 모든 부처는 오직 일승(一乘)으로써 생사(生死)를 벗어난다"고 하였다. 또 「승만경」 일승장(一乘章)에 "일승(一乘)을 얻는 것은 곧 아무다라삼(阿無多羅三) 약삼보제(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를 얻는 것"이라 하였으니 일승(一乘)은 곧 정각(正覺)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오직 일승(一乘)이 있을 뿐인데 중생의 근기(根機)에 응하여 삼승(三乘)의 법(法)을 설할 뿐이다.

대승불교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마명(馬鳴)이 논(論)하기를, 「여래(如來)가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사람들의 마음씨가 착하고 총명하였으므로 원음(圓音)으로 설법하면 모든 중생이 한결같이 이해하였다. 그러나 여래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의 알아듣는 정도가 같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원효(元曉)는 주석하기를 원음(圓音)이란 곧 일음(一音)이라고 서두를 열면서 세 논사(論師)의 설(說)을 열거한다. 「중생(衆生)이 근성(根性)에 따라 제각기 일음(一音)을 얻고 다른 소리는 듣지 아니하여 착란 되지 아니하니 이처럼 음(音)의 기특(奇特)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음(一音)이라 한 것이다. 음(音)이 시방(十方)에 두루 하여 근기(根機)가 성숙한 정도에 따라 들리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원음(圓音)이라 한다.」

이어서 원효(元曉)는『화엄경(華嚴經)』을 든다. 「불음(佛音)은 불가사의하니 다만 일음(一音)의 말이 곧 일절음(一切音)일 뿐 아니라, 여러 법(法)에도 똑같이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 그는 나름의 해석으로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 곡조를 깨뜨리지 않고 산란하지 않고 두루 모든 곳에 미치고 그러면서도 리듬이 살아 있으니 원음(圓音)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음(圓音)의 노래는 저절로 불려지는 것이다. 즉 법신(法身)의 자재(自在)한 뜻이다.」라고 일음(一音)의 뜻을 설명하였다.

말하자면 신종명(神鍾銘)의 원음(圓音)은 크게 보아 일승(一乘) 및 일음(一音)과 동의어(同意語)이며 이 신종(神鍾)을 만드는 첫째 목적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음관(音管)이라는 장치를 창안(創案)하면서까지 내도록 함으로써 대담하게도 절대(絶對)의 진리(眞理)인 원음(圓音)을 표현하려 함에 있었다. 그 원음(圓音)이란 개념은 마명(馬鳴)의『대승기논(大乘起論)』화엄경(華嚴經) 원효(元曉) 대승기신논소(大乘起信論疏), 별기(別記)』로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시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원음(圓音)이란「화엄경(華嚴經)」에 근거한 진리(眞理)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Ⅳ.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미술학적(美術學的) 위치(位置)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정치적(政治的)으로 이상적(理想的) 통치자(統治者)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미지를 성덕왕(聖德王)에 부여하기 위하여, 종교적(宗敎的) 지혜(智慧), 힘차고 아름다운 조형(造形), 음관(音管)의 창의적(創意的) 고안(考案), 최고도의 과학(科學) 기술(技術) 등이 응집되어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하나가 된, 기념비적(記念碑的) 작품(作品)이다.

불신(佛身)을 나타낸 석불사(石佛寺),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한 불국사(佛國寺), 불음{佛音, 즉일(一乘)의 원음(圓音)을 내려 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등, 세 작품을 ‘新羅 三寶’라 부르고 싶다. 이들은 인간은 제 각기 다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내 자유로워지다.이들은 한결같이 화엄사상(華嚴思想)을 조형예술품(造形藝術品)으로 구현(具現)하기 위하여 독창인(獨創的)인 조형력(造形力)을 유감없이 발휘된 위대한 예술품들이다.

 

▲ 하대 문양

 

불과 28년 전 글이다. 신종의 위상을 이렇게 여러 시각에서 정립하려고 쓴 글도 그 당시엔 없었다. 그러나 옳지 않은 용어들을 여전히 많이 썼고, 요즘 깨친 궁극적 진리는 조금도 언급하지 못했다. 이제 쓴다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격세지감이 있어 숙연해진다. 그런데 지금 이 신종에 관해 쓰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나는 그 당시에 머물러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시각각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종과의 운명적 만남은 또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종은 그 이후 전개하는 한국 범종의 모델이 되어 있음을 알았다. 신종만 해독하고 해석하면 그 이후의 모든 범종은 저절로 풀린다.

국립박물관 퇴임 후, 이화여대 강단에 서면서 고구려벽화 연구하기 시작하여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내 시각과 사고방식은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아니라, 말 그대로 혁명이 일어나서 그 당시 칠판에 “Revolution is now”라고 썼지만. 그 당시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지금은 칠판에 “Revolution has done”이라고 쓸 것이다.

서울에 온 후에도 자주 경주에 가서 신종을 조사하며 계속하여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비록 완벽히 파악했다고는 하나 인식의 심도와 강도를 즐기고 있다.

우선 고려시대 천흥사(天興寺) 범종을 다루어 보자. 그 까닭은 이 범종이 성덕대왕신종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이미 15년 전에 범종 연구 모임에서 문양들을 모두 풀었기 때문이다. 그 모임은 그 후 곧 해산되었다. 천흥사 범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감상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을 특별히 사물(四物)이라고 하는데, 사물은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소리를 통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네 가지 의식구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런 설명이 올바른지는 알 수 없다. 성덕대왕신종은 통일신라시대인 771년에 완성된 것이지만, 1010년에 만들어진 천흥사 범종(天興寺銘 梵鍾)은 이러한 전형적인 한국 종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고 전체 높이 128.3㎝, 종 몸체의 높이 94㎝.로 가장 크다. 

현재 일반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범종의 상대(上帶)와 하대(下帶)의 문양과 같다. 천판(天板) 둘레에는 신라 종에 보이는 연판대(蓮瓣帶)를 둘렸다. 상대와 하대는 연주문(連珠文) 사이에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을 조각하였고, 유곽(乳廓)은 단순한 보상화문대(寶相花文帶)를 조각했다. 유곽 안에는 원형의 8판 연화좌(蓮花座) 위에 도드라져 있는 9개의 유두(乳頭)를 배치하고, 종신에는 2개의 당좌와 두 비천을 배치하였다. 당좌는 원형의 자방(子房)을 갖추고 그 주변에 8판의 연판을 둘렀으며, 연판 주위에는 작은 연주문대를 두었다. 그리고 다시 그 외곽에 인동당초문대를 두르고 가장 외곽에 있는 선에는 굵은 연주문대를 두었다. 유곽 밑에 위패형 명문곽(銘文廓)을 설치하여 그 속에 ‘聖居山天興寺鐘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는 명문을 새겼다. 충남 천언 천흥사는 성거산 밑에 고려 태조 4년(921)에 창립하였다는 사찰이다. 요나라의 연호인 통화 28년은 1010년(현종 1년)에 해당힌다. 현재 범종 연구자들의 설명은 대체로 이와 같으며, 보다시피 현상을 단순히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모든 문양에 관한 상징은 조금도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문양의 명칭은 모두 올바르지 않다. 그러면 15년 전에 범종 연구회에서 천흥사 범종 표면의 문양들의 밑그림을 그려서 채색분석한 것 몇 점을 싣는다. 범종의 면모들(도 1. 도 2. 도 3. 도 4)과 사각 보주대의 밑그림(도 5-1)과 채새분석한 것(도 5-2)을 싣는다. 범종은 동제 종이므로 색이 한 가지이므로 파악이 어렵지만, 채색분석하면 분명히 보인다. 올바른 명칭과 문양들의 상징은 제2회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저작권자 © 피플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