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에 충실해야 제대로 된 문인화를 완성할 수 있다' 운정 박등용 화백

  • 입력 2023.12.08 12:41
  • 수정 2023.12.08 12:42
  • 기자명 김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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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 문인화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 박등용 화백이다. 다소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문인화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그가 고희를 기념한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런 그에게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기본에 충실한 것이다. 박 화백은 비어 있는 화선지 위에 먹을 머금은 붓으로 점을 찍거나 선을 그릴 때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부터 문인화가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마흔 넘어 꿈에 다가가다

전북 임실의 한 가난한 집에 태어난 박등용 화백은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밤새 호롱불 아래에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중학교 때 쉬는 시간에 간판을 제작하는 사람이 글씨 쓰는 걸 구경하다 수업까지 빼먹을 정도로 글과 그림에 푹 빠져 있는 소년이었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변변한 도구 없이 손에 잡히는 붓으로 글씨를 흉내 내다 부모님께 혼나기 일쑤였고, 이후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대학 진학 대신 큰 광고회사에서 도안사로 근무하다 40대 중반이 넘어서야 꿈으로만 간직해온 길로 들어서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 꿈은 잊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더 암담했다. 당시 제대로 된 문인화를 소화해내는 사람이 없었고, 필력 역시 이제 막 시작한 지라 실력이 쉬 늘지 않았다.

이에 박 화백은 혼자서 피나는 노력을 하고 부족한 부분은 실력 있는 서예가들을 찾아다니면서 수년에 걸쳐 지금의 필력을 소화하게 됐다고 밝혔다. 점 하나 찍고 선 하나 그리는 것도 몇 년의 시간을 들여 공을 들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을 구현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황국 70Χ135
황국 70Χ135

단순한 호기심 넘어 흥미를 느껴야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세상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면서 문인화와 서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추세는 제대로 된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문인화와 서예에 대한 수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심지어 운정서화실에 글과 그림을 배운 제자 중에는 미대를 졸업하거나 관련 경력을 쌓은 사람들도 있지만, 문인화와 서예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박 화백은 이런 제자들이 글과 그림을 몸에 익히고 흥미를 두기까지 부단한 시간이 걸리므로 수업시간에 제자들을 일일이 지도하기보다는 각자가 좋아하는 작업을 하도록 유도하면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수업을 통해 제자들의 실력이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박 화백이 이 과정에서 제자들에게서 배우는 것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해바라기(삶) 45Χ70
해바라기(삶) 45Χ70

꾸준히 닦고 연마하는 절차탁마가 필요

일단 글과 그림에 흥미를 느꼈다면 지금부터는 절차탁마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하얀 화선지 위에서 점과 선으로 시작한 기본기는 문인화에 대한 자세와 마음가짐을 닦고 연마하는 과정임을 뜻하기도 한다.

점과 선에 대한 기본기가 쌓일수록 몸과 마음은 경건해지고, 이러한 일련의 수련과정을 통해야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구도가 잡히기 시작하고, 이와 더불어 한 발 물러서서 작품을 조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까지 생겨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옛 것을 이어간다는 것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군자나 문인화 등은 1년 정도 배우면 되겠지 쉽게 생각하고 접근하지만, 먹색이나 필력으로 표현이 돼야 하므로 선 하나에도 수만 번의 연습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또한,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붓 하나로도 일필휘지해 문인화를 완성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희열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향기(꿈) 45Χ70
향기(꿈) 45Χ70

자신만의 색깔과 재해석으로 탄생한 문인화

서양화와 달리 여백도 그림의 일부가 되므로 붓이 가지고 있는 역할과 중요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 붓을 제대로 손에 익혀 점 하나를 찍거나 선 하나를 그릴 때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작품이 될 수 없다.

섬세하면서 간결하기도 하고 나아가 여백과 어우러진 일필휘지의 필력이 차지한 자리에는 화백의 내면과 정신, 부단히 갈고 닦아온 예술가의 혼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여기에 사물의 내면을 작가 나름대로 해석한 문인화의 특성에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박 화백 작품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점과 선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박 화백의 문인화에 대한 비판 여론도 있었지만, 작품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재해석하는 한편,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문인화가 동떨어지지 않기 위해 현대적인 감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한 점으로 평가받아야 할 지점이다.

여기에 박 화백은 참새 등의 소재를 이용해 사실적인 표현을 가미한 것이 다른 문인화와의 차별점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등나무 45Χ70
등나무 45Χ70

전시회 소식과 또 다른 운정체 예고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개최하지 못했던 개인전의 소식도 전했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집합금지가 해제되면서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동안의 작품을 엄선해서 고희를 기념하는 개인전을 개최하자는 제안이 들어오면서 전시회 추진위원회까지 조직됐다.

전시회는 내년 10월 서울 인사동에 있는 한국미술관 3층 전관에서 박 화백의 작품들 위주로 개최될 예정이다.

이어 박등용 화백은 그가 만든 운정체는 하나의 완결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붙는 위치, 쓰는 위치에 따라 나중에 서체가 변화하면서 또 다른 운정체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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