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꽃 피우다...선박수리 명장 두손레저 손종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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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에서는 한국 아웃보도 엔진의 선구자이자 선내외기 수리 명장인 손종구 대표를 레저산업과 명장이라는 주제로 다룬 바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에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5, 60년대에 태어난 아버지, 어쩌면 할아버지 세대들이 가난 속에서도 어떻게 꿈을 키워왔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에는 어떤 원칙과 신념이 있었는지 선박 수리명장인 최 대표의 삶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봤다.

막막하던 삶 속에서 운명을 만나다

손 대표는 경기도 광주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4학년 때 서울 뚝섬으로 이사를 오게 되는데, 당시 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다쳐 몸져눕는 바람에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로 나서게 되지만, 아픈 사람이 있으면 돈 들어갈 데가 많아 집안 사정이 쉬 나아지지 않는다. 그때 아픈 아버지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1968년에 시내 전차와 함께 사라진 기동차 운전수였던 아버지의 지인이 어린 그에게 먹고살 걱정이나 덜라고 신당동에 있던 국내 최초 선외기/선내기 수리업체인 ‘신기사’를 소개해주게 된다.

65년, 한참 꿈 많을 나이 15살 중학생인 그에게 어린 나이임에도 취직이 되면서 당장의 끼니 걱정은 사라졌지만, 법관을 꿈꾸었던 그의 미래와는 아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신기사’에는 사장님과 직원 3명이 더 근무하고 있었는데, 중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학교에 가야 했지만, 바쁘게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회사 분위기상 학교에 가는 걸 포기하고 회사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회사 사람들은 일은 그만두고 학교에 가라고 했지만,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67년에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게 된다.

한국전쟁 후인 60년대는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해도 잘 산다고 할 정도로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어린 그의 월급은 2,000원이었다. 당시 5급 공무원 월급이 15,000원으로, 이 분야의 10년 이상 근무한 숙련공이 돼야 받을 수 있는 큰돈이었고, 3년 이상 근무한 성인 근로자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8,000원 수준에 불과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에 도저히 출구마저 보이지 않던 시절 그저 아무런 특별한 계획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2년만에 찾아온 친구의 교복 입은 모습을 보며 다시 새로운 꿈을 꾸기로 마음먹게 된다.

주경야독으로 명장 반열에 들어서다

법관을 꿈꾸던 소년이 향한 곳은 당시 국내 2개밖에 없었던 자동차 관련학과였던 한양공고 자동차학과였다. 회사에서는 어깨 너머로 선박엔진에 대한 실무를 익히고 학교에서는 이론을 배우게 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된다. 당시 자동차에는 4싸이클이 전부일 정도로 신식 엔진이 장착돼 있었지만, 선박에는 2싸이클 위주였고 4싸이클은 사실상 전무할 실정이었다. 자동차 엔진을 배우면서 선박 엔진에 응용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게 된다. 여기에 정비사 자격증 2급과 3급을 딸 기회도 제공됐는데, 정비회사에서는 반드시 현장 총책임자인 주임(2급)과 부주임(3급)이 상주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60년대에 선박, 모터보트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국내에 수입이 금지돼 있었고 78년에서야 금지조치가 해제되게 된다. 그 전까지 그는 주로 군부대에서 쓰는 특수 모터보트나 경찰에서 사용하는 경비정의 엔진을 수리하며 기술을 익혀 나갔다고 한다. 심지어 70년대 초 3년이라는 남들보다 긴 군 복무기간에도 선박 엔진 등을 수리하는 업무에는 매번 그가 투입될 정도로 선박과 기계가 그의 인생에 깊게 드리우게 된다. 그만큼 그의 실력도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던 셈이다.

그러던 73년 서울에 큰 장마가 내리면서 뜻하지 않는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회사가 있던 신당동은 물론 공장이 있던 풍납동에도 난리가 난 것이었다. 이 일이 우연이었는지 이듬해 ‘신기사’를 운영해오던 나이 많은 사장은 손 대표에게 호주 대사 등 고객 리스트와 회사 정보를 넘겨주고 물러나게 된다. 물론 손 대표가 그 전부터 선박 수리에서부터 고객 상대까지 해왔던 터라 회사를 운영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4년 후 선박, 모터보트가 사치품 목록에서 해제돼 모터보트를 가진 정․·재계 인사들도 VIP 고객이 되면서 사업은 번창하게 된다.

고객과 가치를 중시하는 인생을 살다

손 대표의 삶에 있어서 가족 사랑과 일에 대한 열정 이외에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먼저, 자신의 실력을 믿어주는 고객들을 장인정신으로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급한 고객의 요청에도 손 대표는 수리기간을 1~2일 더 걸린다고 하는데,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수리를 대충하면 티가 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결함이 있는지 살펴보고 큰 이상이 없으면 원래 날짜를 수리를 끝낸다. 수리비도 과도하지 않게 청구하므로 고객들로부터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신뢰를 구축해 손 대표를 소개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58년이라는 시간이 증명하듯 다른 업체에서 못 고치는 고장 수리를 그의 손을 거치게 되면 문제가 없어지게 된다. 달리 그를 명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선박 수리를 시작한 이후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수상레저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아 전망이 불투명했다. 하지만 사치품 제한이 풀리고 국민소득이 계속 올라가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레저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게 되고, 선박 및 수상레저가 활성화된 상황에 이르게 된다.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의 기술력이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피어났다가 이제 만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도 불편한 시선이 하나 있다. 사회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돈의 가치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요트나 선박이 워낙에 고가품임에도 자판기에서 물건 빼내듯이 구입한 다음 정기점검 없이 소중히 다루지 않는 사람들이 무리하게 가격을 고집하면 일감을 맡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성으로 더해져 소중히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인생을 즐길 줄 알고 품격을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뒤돌아보니 천직이었고 운명이었다

손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두손레저’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와 수입 자유화로 인해 82년에 창업해 조달 입찰 등 투명한 회사 운영을 위해 87년에 설립되게 된다. 오늘날까지 두손레저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한양공고 자동차학과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이어져 온 손 대표의 기술력이다. 두손레저의 ‘두손’은 머리를 뜻하는 한자 ‘두’와 손을 의미하는 ‘손’이 합쳐진 것으로, 주경야독으로 이론과 실무를 쌓았듯이 머리와 손을 이용하여 두 손으로 선박엔진을 수리한다는 의미가 있다.

되돌아보면 그 시절 자동차 내연기관에 관해 공부한 것을 선박 엔진 수리할 때 접목한 것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두손레저’ 설립 이후 고객들의 신뢰가 쌓이면서 일감이 늘어나기 시작해 계절을 타지 않고 항상 일감이 넘쳐날 정도가 됐다고 전했다. 비록 돈에 욕심이 없어 많은 돈을 벌지 못했지만, 그는 ‘두손레저’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술력과 깊은 고객 신뢰 기반, 정당한 가격 제시, 미리 직수입한 부품의 여유분으로 현장 즉시 투입 가능, 정확한 고장 수리와 하자 처리 등을 꼽았다.

그에게도 유혹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순간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어느새 새로운 기계를 수리하고 있었고, 이제 와 보니 결국 천직이자 운명이지 않았나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 3년 후 그는 또 다른 삶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은 기대수명이 늘어나 사람들이 환갑을 중요시하지 않지만 15살에 일을 배우기 시작해 앞으로의 3년까지 더한 61년 동안 한 업계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유할 만큼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면 이제는 충분히 또 다른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을 것이다.

최 대표 이외의 또 다른 명장을 기다리며

현재 두손레저는 그의 아내와 아들인 손지수 실장이 함께하는 가업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그 동안 회사는 손 대표의 명장 실력에 일감이 벅찰 정도로 많아 손 실장이 아버지를 도와주려고 회사에 합류하게 됐지만, 여기에도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손 대표와 그의 아내가 과거 한 차례 모두 인생의 중대한 고비를 겪으면서 이제 몇 년 후면 다가올 새로운 인생을 맞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손 실장 명의로 설립된 ‘두손레져마린’은 아버지가 걸어온 지난 58년의 발자국과 기술력을 익히며 한층 업그레이드한 버전으로 차츰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다.

취재가 끝난 후 대성리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손 대표는 인터뷰에서 아들이 군대 가기 전 아버지로서 아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야기한 것이 걸렸던지 다시 손 실장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에 합류하기 전부터 휴일에 사무실에 나가서 근무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반대하던 아들이 요즘에는 회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는지 본인이 손수 일요일까지 회사에 나가 업무를 처리하고, 취재 당일에도 새벽부터 출장 준비하는 등 당장 회사를 맡겨도 될 만큼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외국 선박회사 담당자와 직접 통화하고 매뉴얼을 95% 직접 번역하는 한편, 외국에서 부품을 직수입해 회사비용을 절감하는 등 아버지보다 능력이 좋다고 평가했다. 최 대표가 직접 60년 동안 기계를 만져 선내기와 선외기를 수리하고 모터보트와 엔진을 판매해 오늘의 명성을 얻어 왔다면, 아들은 합리적인 경영방식으로 회사의 질적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의 명장 실력만 더해진다면 또 다른 21세기형 명장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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