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송이 국화꽃을 5·18열사들’께 바치며, 기록잡지 <그날> 발행

박춘림 티앤티미디어 대표

  • 입력 2023.07.20 14:08
  • 수정 2023.07.20 20:46
  • 기자명 박정례 기자·유새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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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소리로 5·18을 혼자 외쳐보라. 그리하면 아직도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임들의 외침이 섬광처럼 번쩍이는 기억으로 재생될 것이다. 5·18 그 이름은 여전히 민주 평화를 품고 있는 생명의 씨앗인 까닭이다. 다시 한번 쟁쟁한 5·18의 소리를 듣자. 가신님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단 말인가? 산자의 입장에서 소리 높여 외친다.
 
금남로에서
5월 광주 금남로에서 박춘림 씨를 만났다. 5·18 당시 조대여고 2학년생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캐리어에 자신이 만든 기록 잡지 <그날>(https://kmong.com/gig/473655)을 싣고서 금남로에 설치된 부스로 향하는 중이었다. 박춘림 씨는 서울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여 4시간 반을 달려서 광주에 도착하였다. 승용차에 기록 잡지 <그날>을 싣고서다. 광주에서의 1박 2일 여정에서 그 첫 일정은 먼저 광주 북구 운정동에 있는 5·18민주묘지로 달려가는 일이었다. 민주 묘지에 들어서면 동지들이 헌화 부스를 설치하며 기다리고 있을 거다. 햇수로 21년째인 꽃 봉사다. 
오래전이었다. 20여 명의 동지들이 ‘천상의 열사께 천 송이 국화꽃을’이라는 주제로 뜻을 모아 헌화회를 결성한 것은. ‘그날’ 총에 맞아 죽고,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불구가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처럼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광주시민들이라면 대부분 5월의 험악한 장면을 직접 보았거나 이웃 친지 동료들로부터 참상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다. “이럴 수가? 같은 광주 하늘 아래서 누군 날벼락을 맞고 누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구나!” 일을 당한 사람들의 참상을 잘 알고 있기에 열사들에 대한 부채 의식을 안고 가슴앓이하던 사람들이 뜻을 합쳤던 것이다.  

서울 상경과 전산 업무
박춘림 씨는 여고 졸업 후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82학번인 그녀는 졸업하자마자 진로를 탐색하던 중에 컴퓨터학원에서 전산 과정을 수료하게 된다. 이게 잘 맞아떨어져 모 회사의 전산실 직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국세청조차 전산화가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제가 하는 일은 주로 의료보험수가를 입력하거나 폐수표를 받아 일련번호를 입력하는 일이었지요. 당시 전산부에는 저와 같은 일을 하는 직원이 100여 명이나 됐습니다. IT 붐을 타고 전산부는 회사에서도 핵심부서로 손꼽히고 있는 부서였어요.” 그런데 박춘림 씨의 서울살이는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사투리가 심했다. 고향에서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말글살이가 직장을 찾아 서울이라고 와 보니 생경하면서도 튀는 요소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전산실의 중간관리자는 사투리와 광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노조를 결성할 것 같다’는 식의 추측성 음해를 해댔다. ‘사람 야무지고 성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였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어내면서도 일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행동이 민첩했다. 결근 한번 없이 근무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그녀가 전산부에서 근무한 기간은 총 10년간이었는데 그중 2년은 결혼 후 재택근무로 채운 기간이다.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결혼 후에도 2년간이나 재택근무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해마다 5월, 이상한 병치레
그런데 박춘림 씨는 이상하게도 1년에 한 번꼴로 입·퇴원을 반복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주로 4월에서 7월 사이에 일어났는데 그 과정에서 잦은 유산과 병치레를 겪으며 어렵사리 딸 하나를 낳게 된다. 남편의 보살핌은 큰 힘이 됐다. 입원할 때마다 목돈이 들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어서 털고 일어나라!”는 격려로 일관했다. “특실에 입원하고 싶다”고 청을 해도 군말 없이 받아주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 병이 찾아오면 ‘또 아프구나’ 했지 그것이 마음의 병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매년 5월쯤이면 찾아오는 그 병 말이다.

치유를 위한 회복
“꽃 봉사를 시작하고부터 좋아졌어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광주민주항쟁은 광주사태로 불렸잖아요. 어떤 이는 열사들을 폭도라고도 했지요.” 

결혼 전 학생 신분이던 동생을 돌보며 자취생활을 하던 처지였기에 생계를 위해서라도 직장생활이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안 됐다. 뭐든 혼자 삭히며 지내던 습관이 결혼 후에 병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동창회에 가게 됐어요. 고교 졸업 후 20년 만이었습니다. 모두 한마디씩 했지요. 5·18로 인해서 속상했던 일들을요. 분위기가 무겁게 흘러갔던 거예요. 친구 하나가 침묵을 깨며 ‘우린 살아 있잖아!’하고 울먹였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광주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작은 일이라도 하자. 먼저 가신 열사들에게 작은 정성이라도 바치는 사람이 되자고요.”

열사들을 위한 헌화 봉사
그 이후 박춘림 씨는 해마다 광주 5.18 민주 묘지에서 ‘천상의 열사들께 천 송이 국화꽃을’이라는 펼침막을 걸고 헌화 봉사를 하게 된다. 개인 자격으로 민주 묘지를 찾는 참배객들은 준비 없이 오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국화꽃과 생수를 준비해 뒀다가 건네는 일이다. 2003년에 20여명의 회원을 모아 시작한 일이 어언 21년이 됐다. 

“기념식장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올해도 너 왔냐고 열사들이 반가워할 거예요’ 어떤 이는 ‘나도 하고 싶은 얘기가 좀 있는디’ 하며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고 싶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잊지 말아야제, 잊으면 어떡혀! 그렇지요, 꽃 나눠주는 양반?’ 하며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고요.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언젠가부터 그분들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는 거였어요. 꽃 봉사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고, 정말이지 저 자신조차도 허전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기록잡지 <그날>
박춘림 씨는 2015년도에 잡지 발행을 결심하게 된다. “5·18로 직접적인 상해를 입지는 않았더라도 나처럼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구나. 그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어 기록으로 남기자” 그렇게 해서 나온 잡지가 <그날>이고 올해로 통권 6호째다. 

“사실 올해는 유난히 망설여지더라고요. 코로나19로 3년이나 중단됐었거든요. 콘셉트를 잡는데도 애를 먹고, 인적 네트워크도 망가진 상태였어요. 하지만 봄이 되자 모임도 많아지고 연락도 활발해졌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원고가 다 채워졌고요.” 

배포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궁금했다. 

“이번에 총 3000권을 찍었습니다. 이심전심이었나 봅니다. 만들 때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과물을 보더니 남편도 ‘잘 했다’고 해요. 차도 내주고요. 광주에는 2000여권을 싣고 왔어요. 나머지는 청계광장 기념식장에서 서울회원들이 배포를 할 거고요.” 

그녀의 모습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큰 행사가 있을 적이면 언제나 개량 한복 차림으로 나서기 때문이다. 때마침 캐리어에 책 박스를 끌고 가는 그를 전일빌딩 앞에서 만나게 됐다. 길 건너 문화의 전당 지하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차에서 책을 운반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박춘림 씨는 5·18 때 고교생 신분이던 ‘기동타격대’ 몫으로 배정받은 부스 한쪽에 잡지를 쌓아놓고 참석자들에게 배포하는 중이었다. 

전야제,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 
4시가 되자 노변에 있던 부스가 철거되기 시작했다. 행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부스를 비운 도로에는 전야제의 선발대 격인 600여 명의 풍물패들이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기록 잡지 <그날>을 잠시 한쪽에 옮겨놓고 연희패에 섞여 들었다. 이때 한 여성 풍물단원이 하늘이 찢어지도록 ‘임을 위한 행진곡’을 태평소 가락에 실어 내뿜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박춘림 씨가 보였다. 풍물단원들이 모두 집결하자 진행원의 신호에 따라 각 풍물단의 상쇠들이 일제히 휘모리장단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비록 소속과 연배는 다를지라도 거리를 메운 연희패들의 외침이 신명으로 승화되며 천둥번개를 부르고 있었다. 바윗덩어리처럼 단단한 5월 정신의 뇌성벽력이었던 것이다. 그 속에 박춘림 씨가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니었다.

 

Profile
조선대학교부속여자고등학교 졸업
국민대정치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청소년지도사(자격증취득)

티앤티미디어 대표
성북교육문화사랑시민모임대표
광주.전남 시도민회(재경호남향우회)광주여성회장

2021 대총선 성북구국회의원후보(민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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