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기의 미술여행]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Brisbane) "프란체스카와 마리 앙투아네트"

김석기 작가l승인2021.11.22l수정2021.11.2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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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스부르크 거리

2세기에 이미 기독교가 전파된 오스트리아는 1815년 나폴레옹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지만,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 페르디난드 황태자 암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고,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의 왕가는 붕괴되었다. 1918년 공화국이 수립되고 1938년에는 독일에 합병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에 의하여 점령되었으며, 1954년 영세중립국을 조건으로 완전하게 주권을 회복하였다.  
  
알프스의 천연적인 아름다움 속에 감추어진 진주 같은 나라 오스트리아는 우리나라와 수교국이며, 우리에게 오스트리아보다 오지리(墺地利)라는 국명으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나라다. 또한 한때 '오지리 댁'이라 불렸던 고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고향이기도 하다.  
   

▲ 알프스 비경_김석기 작가

 

1933년 프란체스카가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 여행 중 호텔 식당에서 자리가 없어 서성이던 한 청년과 합석을 한 일이 있었다. 이튿날 프란체스카는 합석했던 청년이 한국의 이승만으로, 그가 일제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실정을 홍보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미국에서 달려온 청년이라는 사실을 방송과 신문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프란체스카가 신문 자료들을 모아 스크랩하여 호텔 안내데스크에 전달한 것이 인연이 되어 34세의 프란체스카와 59세의 이승만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1년 이상 편지를 교환하던 그들은 양가의 가족과 동지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1934년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호놀룰루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국인으로 최초의 미국 박사가 된 이승만은 1945년 대한민국이 해방되던 날 워싱턴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가 오늘을 가져오게 하였다'라고 말함으로써 프란체스카 여사의 역할을 증거하였다.   
  
1948년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국민들은 외국인 영부인에 대하여 냉담했으나, 프란체스카는 꿋꿋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대통령을 도왔다. 경무대 초대에는 필히 부부가 동반하도록 하였고, 초대 상공부 장관에 최초로 여성 장관 임영신이 임명되는 등 여권 신장의 기회가 프란체스카에 의하여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에서 병상 생활을 할 때, 프란체스카는 베스트 와이프로 칭송을 받았으며, 1965년 이승만 박사가 별세한 후,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귀국하여 20여 년 간 '이화장'에서 아들 이인수 씨와 며느리 조혜자 씨와 함께 여생을 보냈다.
  
용감한 여인, 아름다운 '오지리 댁' 프란체스카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교훈을 남겼다. 우산 한 개로 30년간 사용하였고, 대통령의 양말은 물론 자신의 스타킹까지 직접 기워 신었으며, 한복을 너무 좋아해 평생을 즐겨 입었다. 그리고 김치 담그는 법, 콩나물 기르는 법, 찌개 끓이는 법 등 한국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녀는 92세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나를 위해 꽃을 장식하지 말라, 1달러를 황금처럼 아껴라.'하고 유언을 남겼던 영원한 한국인이었다. 
  
독일의 국경선을 넘어 알프스의 아름다운 설산 위에서 프란체스카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담아 초상을 그리는 가운데 달리던 차는 어느덧 알프스의 중심도시 인스브루크로 들어선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화적 유산이 남아있는, 해발 574m의 고원에 자리 잡은 인스브루크는 교통의 요지로 스키의 본고장이며, 동계올림픽을 두 번씩이나 치른 도시이다.    
  

▲ 황금지붕에서_김석기 작가

인스브루크의 중심부에 있는 잘루너 거리(Saluner Strabe)를 따라 걷는다. 1765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차남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프랑스의 개선문을 축소하여 만든 문이 나타난다. 남쪽 면에는 삶과 행복을, 북쪽 면에는 죽음과 슬픔을 주제로 한 조각 작품들이 시선을 끈다. 개선문에서 구시가지로 뻗어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가 인스브루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다. 1706년 바이에른 군을 격파한 기념으로 세웠다는 '성 안나 기둥'이 높이 서있고, 길 양쪽으로는 바로크 양식의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구 시가지의 막다른 골목에 인스브루크를 상징한다는 '황금지붕(Golden Dachl)'이 보인다. 3층 발코니를 덮은 차양의 지붕 위에 총 2657장의 금박 동판 장식이 반짝거린다. 1498년 막시밀리 1세가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축제를 보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막시밀리 1세가 사용했던 보물과 동계올림픽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황금지붕' 곁에 있는 '헬블링하우스(Hellblinghaus)'가 아름답고 화려하다. 독특한 꽃무늬 장식이 그 당시 귀족의 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 테레지아거리에서_김석기 작가

1460년 ‘지그문트 대공’에 의해 세워졌다는 '왕궁(Hofburg)'으로 들어선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아들의 결혼식 때 유럽 왕가의 하객을 맞이하기 위해 궁을 호텔식 로코코 스타일로 바꾸었다고 한다. 중앙 홀과 화려한 천정화, 유럽 제일의 미녀로 꼽혔던 엘리자베트 왕비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와의 정략적인 결혼에 의하여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되어 베르사유궁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루이 16세를 업신여기고, 사치와 화려한 생활 속에 갖가지 염문을 만들면서 파리 민중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1789년 왕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였고, 1793년 혁명재판에 의하여 머리가 깎이고 손이 묶인 채 파리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두 여인, 프란체스카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똑같이 타국으로 시집을 가 국모가 되었지만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다 갔다. 두 여인의 삶을 통해 진정한 삶과 사랑이 무엇이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 성당에서_김석기 작가

雨松 김석기(W.S KIM)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경희대, 충남대, 한남대 강사 및 겸임교수 역임
프랑스 몽테송아트살롱전 초대작가
프랑스 몽테송아트살롱전 A.P.A.M 정회원 및 심사위원
개인전 42회 국제전 50회, 한국전 450회


김석기 작가  ksk00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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