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정신과 의사가 건네주는 마음의 연고

김병수 에세이 <상처는 한 번만 받겠습니다>를 읽고

  • 입력 2020.11.19 15:42
  • 수정 2020.11.19 18:01
  • 기자명 이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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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안 그래도 팍팍했던 삶에 코로나19의 여파까지 더해져,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많은 요즘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 또는 무기력증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기존에 학업·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20대의 경우, 지난 5년 간 우울증 환자 수가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최근 도서시장에 이른바 ‘힐링 에세이’ 열풍이 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지친 마음에 따뜻한 말과 위로를 건네 줄 수 있는, 독자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안아줄 수 있는 작품들이 여럿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책에는 대개 ‘개성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저자만의 시선, 통찰력이 담겨있지 않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내용이 다시금 반복되고, 다 읽은 후에도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단지 독서를 하는 그 시간, 딱 그만큼만 따뜻한 온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기분이 든달까. 그런 점에서 ‘힐링 에세이’를 그다지 찾아 읽지는 않는다.

현직 정신과 의사가 직접 쓴 책
'앎의 즐거움'은 낯선 것을 접할 때 강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작가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개성 있는 책을 좋아한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이야기일수록 참신해서 좋다.

현직 정신과 의사가 직접 쓴 《상처는 한 번만 받겠습니다》를 읽었다. 섬세한 문체로 의사의 생각을 오롯이 담아낸 수필집이자, 내담 환자와의 이야기, 글쓰기를 사랑하는 의사의 일상, 이라크 파병기, 아버지로서의 이야기 등 총 45개의 단편을 한데 모아 엮어 낸 책이다. 기본적으로는 ‘자존감’을 주제로 한 에세이 성격이 짙지만, 어느 순간 심리학 책 같기도, 또 어느 순간에는 의학 서적 같기도 하다. 다양한 영역의 지식이 서로 어우러져 강한 흡입력을 만들어낸다. 또, 각각이 독립적으로 구성돼있어 틈틈이 읽기 좋다. 여러모로 시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힐링 에세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존감에 대하여
『요즘 상담하러 온 청년들과 공식처럼 나누는 이야기가 있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왜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건가요?"

"자존감이 낮아서요. 자존감이 높아지면 행복해질 것 같아요."

"자신이 자존감이 낮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책에 따르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단 하나, 그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남들에게 자랑하고픈 잘난 부분부터 상처, 열등감, 실수와 실패의 기억,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게 만드는 못난 부분까지 모두 끌어안아야 한다. 자존감을 올려보겠다고 과거의 상처를 파고드는 건 아무런 효과가 없다. 가능하지도 않지만 콤플렉스를 말끔히 날려버린다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마음 속에 있는 가시 돋친 선인장을 아예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그대로 두는 것. 그것이 바로 '상처는 한 번만 받겠다'는 이 책 제목이 품고 있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상처가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며,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존감이라는 것도 나에 대한 그럴 듯한 이야기를 갖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높다 느끼기도 하고 낮다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은 1부 ‘상담실 문이 열리다’, 2부 ‘의사 대 내담자’, 3부 ‘상담실을 나와서’ 총 3부로 구성돼있는데,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의사로서의 모습에서 개인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된다. '나만의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태도가 책의 구성에도 잘 드러나 있다.

하얀 바탕에 보랏빛, 푸른빛의 물체 두 개. 책을 읽고 표지를 다시 살펴보니 마치 빙산처럼 보였다. 빙산은 극히 일부분만 수면 위로 떠오르고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어, 그 전체 모습을 단숨에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어쩌면 스스로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잘난 부분은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못난 부분은 인식조차 되지 않는 내면 깊은 곳에 감추고 싶어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빙산의 모양을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할까요
『나라는 사람도 좋아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정체성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여 특정한 방향성을 가질 때 형성된다. 좋아하는 것들을 반복할 때 쌓여가는 감정이 기쁨이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면 기쁨 목록이 빈약해진다. 좋아하는 게 별로 없다면, 자아는 약해진다. 좋아하는 것이 다양하고 풍성할수록 나라는 사람도 튼튼하게 구성된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럴 때면 이 책에서 추천하는 대로 일단 종이에 가능한 많이 적어보자.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카페 창밖으로 풍경 보기,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의 노래 듣기, 레어 치즈케이크 먹기, 연필로 글쓰기, 노란색 뿔테안경 쓰기 등. 철저히 주관적인 것들로 리스트를 채워 넣는다. 만약 오늘 우울했다면 이 기쁨 목록의 행위들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확인해보자. 스트레스와 고민에만 집중하지 말고, 당신이 최고로 희열을 느끼는 순간으로 하루를 채워나간다면 우리의 자아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성 가득한 요리를 대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핸드폰으로 백종원 OOO을 검색하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 후 설거지를 하는 시간까지 모든 과정이 즐겁다. '날 위해 이렇게 준비해줘서 고맙다'는 상대방의 말 한마디면 구름 위에 누워 하늘을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 든다.

 

즐거움을 잃지 않는 삶
이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이야기는 <전쟁이 터져도, 먹어야 산다>라는 단편이다. 2004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서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때 작가는 군의관으로 파병을 떠났다. 시내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사상자가 나온 시기였다. 그는 그때 타국 군대의 주둔지 안에서 피자 굽는 화덕, 배스킨라빈스, 하드락 카페를 보았다.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구색 맞춰 차려진 뷔페식 식당을 보았다. 미군기지 식당에서 랍스터를 먹었던 순간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기도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디 살벌한 전투 지역에서…"라며 군기 바짝 들게 하고 기본적인 욕구마저 통제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아무리 살벌한 전쟁터라 해도 기본적인 욕구와 삶의 즐거움을 잃지 않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었다.

입시 때문에, 취업 준비 때문에, 가족 때문에, 애인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각종 고민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럴 때일수록 맛난 것 찾아 먹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울해 죽겠는데 밥 먹을 시간이 어딨냐'보다는, '우울해 죽겠으니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지'하며 스스로를 달래보자. 좋아하는 것으로 일상을 채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행복을 느끼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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