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뒤흔든 '박항서 매직'

박항서 축구감독

  • 입력 2019.12.24 15:47
  • 수정 2019.12.24 15:56
  • 기자명 박예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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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명의 한국인이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대한민국 前국가대표팀 수석코치이자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맡은 박항서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실제로 베트남을 방문하면 전국 도시 곳곳에서 박 감독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거리거리 마다 베트남 현지인들이 박 감독 얼굴이 담긴 티셔츠를 입고 깃발을 흔드는가 하면, 택시나 거리 입간판에도 박 감독의 얼굴이 있다. TV를 켜면 박 감독의 광고 영상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연예인이라 해도 이럴 수는 없을 정도다.

'박항서 매직'이라 불리며 박 감독과 베트남 축구팀이 만들어낸 기적은 2020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베트남 축구영웅, 실력과 인품을 갖춘 감독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은 2019년 시작부터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에서 놀라운 성과를 냈다.
조별리그 D조 첫 2경기에서 이라크와 이란에 발목을 잡히며 16강 진출이 미지수였으나 3차전에서 예멘을 꺾으면서 3위를 차지했다. 3위 와일드카드에서 E조 레바논과 승점, 골득실, 다득점이 모두 동일했으나 페어플레이 포인트에서 1점 앞서며 기적처럼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16강에서 베트남은 요르단을 승부차기로 꺾으며 아시안컵 사상 토너먼트 첫 승과 함께 2007년 이후 12년 만에 8강에 올랐다. 베트남 축구의 2019년은 그렇게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박항서 감독은 이어 22세 이하 대표팀에서도 신화를 창조했다. 2019 동남아시안게임(SEA)에서 60년 만에 남자 축구 금메달을 차지했다. 1959년 남베트남이 우승한 이후 60년 만이며, 1976년 통일 이후 처음이다. 4승 1무(승점 13)로 B조 1위로 준결승에 진출한 베트남은 4강에서 캄보디아, 결승에서 인도네시아를 잡으며 무패 우승을 달성했다.

이 가운데, 박항서 감독이 부임한 뒤로 동남아시아 축구계에서 베트남과 오랜 앙숙관계인 태국에도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올해 베트남은 단 한 번도 태국에 패하지 않았다. 6월에 열린 킹스컵 4강에서 베트남은 승부차기 혈전 끝에 태국을 잡고 결승에 진출했다.

박 감독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선수들과 베트남 국민들은 그의 인품을 높이 사고 있는 모습이다. 일례로, 인도네시아와의 SEA 결승전에서 승리한 이후 부상당한 상대팀 선수에게 직접 사과하며 안부를 물었다. 베트남 언론은 이에 대해 "친근함과 전문성을 겸비한 지도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베트남 선수들에게 박항서 감독의 역할은 감독 이상이다. 그는 아버지처럼 선수들을 따뜻하게 지도했다. 박항서 감독은 SEA 이후 선수들에게 “고맙고 자랑스럽다”라고 힘을 실어줬다.

 

단점 이겨낸 '악바리' 선수에서 감독까지
이렇듯,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는 박 감독이지만 그의 국내 생활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1959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박항서 감독은 1978년 제20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짧으면서도 빠른 패스를 중요시하는 미드필더였으며, 170cm에 불과한 작은 키로 약점을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극복하며 ‘악바리’라는 별명을 얻었던 평범한 축구선수였다.

1981년 실업 축구단이었던 제일은행 축구단에서 성인 축구 경력을 시작했고, 같은 해 입대해 육군 축구단 충의에서 활동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1984년 럭키금성 황소(現FC서울)에 창단 멤버로 입단한 그는 1984년 4월 22일 유공 코끼리와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골을 기록했다. 1985년 K리그 우승과 1986년 K리그 준우승에 공헌했다. 1988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한 그는 모두 99경기에 출전해 15골을 기록했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목표로 하는 국가대표 선수 이력도 있다. 박 감독은 1977년 제19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하는 20세 이하 청소년 대표로 선발됐으며, 1979년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B팀인 충무에 선발됐다. 1981년에는 1진인 화랑팀에 선발돼 정식 국가대표로 자부심을 갖는 축구인생을 보냈다.

박 감독은 1988년 은퇴한 직후 1996년까지 LG 치타스에서 코치로 지내다가 1997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옮겨 2000년 2월까지 활동했다. 1994년 FIFA 월드컵에는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활약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2000년 10월 허정무 감독이 사퇴한 뒤 2000년 11월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발탁, 12월 한·일 정기전에는 임시 감독을 맡았다. 

허정무 감독의 후임으로 거스 히딩크 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선임되자 감독과 선수들의 가교 역할을 하며 선수단의 융화를 일궈내는 등 2002년 FIFA 월드컵 4강을 이룩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떠난 뒤 2002년 8월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고 논란 끝에 정식계약을 맺었지만,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는 데 그쳐 10월 아시안 게임 폐막 후 경질됐다. 아쉬운 퇴진이었다. 이후 2003년 포항 스틸러스에 코치로 입단하여 2004년까지 활동했고, 이후 전남 드래곤즈 기술 고문을 맡았다.

2005년 8월 새롭게 창단된 경남 FC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된 그는 2007년 정규 리그 4위를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성과를 거뒀으나, 구단 내부 갈등으로 인해 11월 경남 FC에서 물러났다. 2007년 12월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에 취임해 2008년 삼성 하우젠 컵 준우승 등을 거뒀으나, 이후 성적 부진으로 2010년 11월 자진 사임했다. 이후 상주 상무 감독, 창원시청 축구단 감독을 역임하는 등 축구지도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다시 도전해야 한다 그것이 감독의 인생이다
한편 박 감독은 지난 12월 14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 U-22 축구대표팀과 한국에 들어와 올 1월에 있을 2020 AFC U-23 챔피언십 본선을 준비한다. 2020년에 또 다른 ‘매직’을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박 감독은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베트남에서 1년만 버텨보자고 했던데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올해 성과도 많이 거뒀지요. 지난 일들은 추억일 뿐이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위해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감독의 인생이지요."

이와 관련, 대한민국 축구팀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이에 대해 박항서 감독은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는 저보다 더 젊고 유능한 지도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욕심내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으며 생각조차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 축구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또, 저는 베트남과 재계약을 했기 때문에 다른 데로 갈 수도 없고요."

마지막으로 박항서 감독은 한국인 지도자로서 항상 책임감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노력하겠는 박 감독. 베트남의 축구영웅 박항서 감독이 써 내려갈 신화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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