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례 러시아기행 5] 다양한 얼굴,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시베리아의 관문, 데카브리스트들의 도시

  • 입력 2019.06.04 19:21
  • 수정 2019.06.04 19:22
  • 기자명 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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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종착역이다. 이르쿠츠크 역이었다. 이르쿠츠크는 현대 러시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르쿠츠크는 19세기 초부터 일기 시작한 러시아의 젊은 장교와 선구적인 지식인들이 일군 신세계의 상징이었다. 여기서 신세계란, 나폴레옹전쟁에 참전하여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꿈꾸던 세상을 말한다. 그들은 새로운 체재를 동경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전제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며 헌신한 데카브리스트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르쿠츠크는 데카브리스트들이 유배 와서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살아 있는 곳이다.

 

이르쿠츠크, 시베리아의 파리
농노제와 전제정치 폐지를 외쳤던 일군의 귀족들과 청년장교들은 러시아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 날 황제 암살계획을 세웠다. 이 봉기는 실패했고, 500여 명의 시위 참가자들은 기소되고, 투옥된다. 이중 주동자 5명은 교수형에 처해진다. 또한 최소 130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유형 길에 오른다.

시베리아로 유형 간 데카브리스트들은 두 갈래 길을 보여준다. 한쪽이 형기가 끝난 후에도 이르쿠츠크에 정착하여 현지에서 상류 사회의 문화를 꽃피웠다면, 다른 한쪽은 러시아의 농민 사회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보며 농민해방운동에 투신한다. 이르쿠츠크는 그래서 러시아 문화사에서 극적이고도 선진적인 꿈과 야망이 구현된 곳이다. 이는 수형의 도시로 출발했으나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그들의 이상을 실현시키려 애쓴 배경과 함께 유럽의 문화와 러시아의 민중문화가 만나게 됨을 말한다. 

이르쿠츠크, 우리 일행은 앙가라 강변으로 갔다. 먼저 강가에 조성된 사랑의 열쇠 거리를 보면서 다시 키로프광장으로 갔다. 광장에는 백군제독인 '코르차크' 동상이 있었다. '코르차크'는 적군(赤軍)에 잡혀서 총살돼 앙가라 강에 던져진 인물이다. 적군에 의해 총살당한 패장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동상이 세워질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했다. 오늘날엔 관광객들이 찾아 드는 곳이 됐으니 말이다. '제독의 연인'이라는 영화 덕분인지 모른다. 역사의 모순과 함께 이르쿠츠크가 갖는 포용성의 한 단면이라 해두자.

 

러시아 정교회 
정교회의 나라 러시아에 있는 로마가톨릭 성당은 어떤 모습일까. 성당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찍고 이어 주현절 성당을 찾아 미사에 참례하였다. 정교회식 미사다. 러시아정교회에서는 신자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점이 늘 궁금했었다. 의자라고는 없는 교회다. 이 같은 교회 내부를 직접 보며 선채로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을 보니 괜히 신기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민혜경 여사가 두 손을 모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여사의 정교회 방문이다. 필자는 민혜경 여사와처럼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다. 성당 안의 사람들을 살펴보는 일에 더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어 특유의 이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러시아 정교회는 옛 비잔틴 시대의 황금빛 이콘과 전례를 잘 보존하고 있어 초기 기독교 시대의 열정과 순수성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라고 했다. 성당 입구에서는 판매용으로 보이는 성물(聖物)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성가를 부르는 남녀와 금빛 제의를 입고 향을 사르는 사제가 보였다. 성가대원과 사제는 서로 계송과 응송을 주고받고 있었다. 노래는 라틴어이지 싶었다. 관광객들 때문에 분심이 들 법도 하건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열심히 찬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기한 점은 사제가 제단 뒤편으로 가기에 퇴장했나 싶었는데 거기서도 여전히 창(唱)미사를 이어가고 있는 점이었다. "이럴 수가?" 통상 사제가 제단 뒤편으로 가면 퇴장한 것고 미사는 끝나는데 여기서는 그렇질 않았던 것이다.

영원의 불꽃
이어 가본 곳은 영원의 불꽃이었다. 24시간 꺼지지 않는다 해서 ‘영원의 불꽃’이고 하나보다. 아니면 러시아 전역에서 전몰장병들을 영원히 잊지 않고 국가적으로 기린다 해서 ‘영원의 불꽃’인가 봤다. 전국적으로 총 21군데서 타오르고 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 전사자로 확인되거나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상징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만도 20여만 명이 참전했고, 그중 5만여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행불자로 분류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죽은 사람들은 묻을 수 있고 추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행방불명인 사람들과 무명용사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영원의 불꽃은 이들 모두를 위해 바치는 최선의 선택인 것 같다. 이르쿠츠크의 불꽃은 1975년부터 불이 점화되어, 이후 하루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는 전언이었다. 

그런 것 같다. 소비에트 당국은 전후 북구를 위해, 비참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차갑게 가라앉은 민심을 추스르고 국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영원의 불꽃을 지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의식은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전사자들과 그 가족들까지 위로하는 의식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 효과적인 예식이자 무명용사들에게 바치는 비할 데 없는 찬사인 것 같다. 

러시아의 유명 관광지는 대게 서로 근접해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재정러시아 시대에 건축된 유명 건물이 거의 그렇다. 이르쿠츠크 역시 광장으로 나가면 거의 모든 건축물을 지근거리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우리가 묵은 앙가라 호텔도 길 하나만 건너면 광장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호텔만 나오면 사방이 탐사 대상지였던 셈이다. 뭔가를 구경하려면 대책 없이 먼 거리를 가야 하는 그런 일은 없어서 비교적 편했다. 

하긴 우리에게도 '4대문'이라는 개념이 있고, '도성' 안 사람들이라는 말도 있다.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온갖 궁궐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 모여 있다. 도성은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북대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유교사상의 '인의예지'에 근거를 두고 붙인 별도의 유교식 이름도 갖고 있다. 힘이 있는 곳에 경제가 융성하고 경제가 융성한 곳에 고급문화가 꽃 피는 식이다. 고급문화는 대게 상류층이 향유할 수 있는 지적 유희와 고상한 취미에서 비롯한다. 근자에 일컬어지는 할렘가나 하류층에서 싹튼 문화는 간혹 별식이 당기듯이 특이한 면은 있지만 선망하는 문화는 아니다. 닮고 싶은 주류문화도 아니다. 물질의 풍족함을 누리다 못해 찢어진 청바지를 대안적인 멋으로 여기는 청소년들의 모습과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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