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례 러시아기행-4] 차창 밖 풍경과 서민가옥

자작림 숲과 바이칼호수를 지나며 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l승인2019.05.20l수정2019.05.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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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적으로 우리 앞에는 농업과 수렵시대를 연상하기에 딱 좋은 풍광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엘빈 토플러가 말하는 제1의 물결시대처럼 문명의 상징인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흔히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소개할 때는 "끝없이 펼쳐지는 야생화 단지와 자작나무 숲을 감상해보라"라고 안내를 한다. 그러한 권고의 기준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느 만큼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다. 안내하는 사람도 여행을 결정한 사람도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서로 '묻지 마' 동조를 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열차 안에 들어앉아 있을 거면서 여행안내문에 적혀있는 구절만 생각하다가는 실망하기 십상이다. 번지르르한 선전 문구에 혹해서 결정한 경우라면 "내가 결정했으니까"라는 심리가 작용하고 일종의 자기 최면식의 합리화가 작용하기 마련이어서 듣던 것과 실제의 차이가 많이 나는 여행이 돼버린다. 이런 여행은 그래서 자칫 과소비로 귀결될 수 있다. 

 

차창 밖 풍경과 설원에 대해
겉과 속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쓰는 글, 내가 그리는 그림, 내가 기획하는 행사, 내가 만드는 영화를 위해 설정하고 구성하고 치장한 것과 실제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되기 일쑤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면서 가끔씩 규모가 큰 도시에서 5분에서 20분 정도 정차를 했다. 그러고 나서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리기를 계속했다. 70시간 너머다. 우리가 열차에 오른 날은 정확히 7월 6일, 절기로 따지면 한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때다. 자연히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경이로운 설원은 목도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끝없이 시원하고 푸른 초록의 대평원을 보았던 것도 아니었다. 기차 안에 들어앉아 스치는 풍경을 감질나게 마주했을 뿐이다.

러시아라는 국명을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닥터 지바고', 60년대 후반인가 70년대 초반에 우리 앞에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란 영화가 있었다. 이집트 출신의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오마 샤리프가 지바고 역으로 나온다. 상대역인 라라 역엔 육감적인 미녀 줄리 크리스티 그리고 유리 지바고의 아내로 찰리 채플린의 딸 제랄딘 채플린이 출연한다. '닥터 지바고'에서 유독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1차 세계대전 후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혼란스러운 페테르부르크를 떠날 때이다. 아내와 장인 장모를 데리고 우랄산맥의 오지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다이내믹한 인상을 준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열차 화물칸 바닥에 누운 지바고. 그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덧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본다. 그의 눈을 통해서 들어온 설원은 일대 장관이었다. 그야말로 감탄사를 연발할만한. 피난열차의 아비규환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장관이다. "나를 위해서는 시인으로 살고, 타인을 위해서는 의사로 산다"라는 명대사를 읊조리는 지바고의 눈에서는 그윽한 지성의 눈빛과 뜨거운 열정의 불꽃이 일렁인다. 제아무리 강팍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지바고의 그런 모습을 보면 감동이 솟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피난열차의 군상들은 설원의 풍경과 속절없이 대비된다.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들은 가슴을 창으로 찔리기나 한 듯 탄식을 토해내며 눈을 고정시키고 장면 하나하나를 따 담기에 바빴다. 

'닥터 지바고'에서 품어 나오는 명장면들을 통하여 그때의 소년소녀들은 오감을 동원하고 감성을 일깨우며 평생을 지탱할만한 감동을 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러시아에 대한 인상은 그 같은 장면들로 수렴됐던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작금의 러시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비에트연방으로 불렸고, 지금도 여전히 군사문화가 진하게 드리워있는 곳이다.

 

전쟁 피해국가 러시아
할리우드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을 미국 혼자서 다 치른 것처럼 포장해 놓지만 실제는 다르다. 인명피해와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너무 많이 치른 국가가 소련이고, 1941년 6월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이후 벌어진 두 나라 간 희생자는 전 세계를 통하여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특히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경에 스탈린의 말을 빌자면, 주코프 원수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전쟁이지. 전쟁이 우리나라 사람 목숨을 얼마나 많이 앗아갔는가. 우리나라에는 일가친척이 죽지 않은 집안이 십중팔구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걸세.”라고 말했을 정도로 소련의 희생은 너무도 컸다. 소련이 전쟁 동안 동원한 군인 숫자가 3,450만 명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죽거나 크게 다치거나 적에게 사로잡힌 이가 2,900만 명을 웃돌아 그 비율이 무려 84%를 넘는다고 한다. 러시아는 이런 나라다. 나이가 들면서 러시아에 대한 진면목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지만 영화 한 편으로 기억된 러시아에 대한 환상과 편견은 현실의 러시아와의 괴리는 상당했다. 무지인가 무식의 소치인가. 그중에는 발레도 있고, 붉은 광장의 아름다운 건축물도 있다. 이런 것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나 볼 수 있는 풍광일 뿐, 동쪽 끝의 시베리아 탐사와는 한참 먼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목적지를 동쪽으로 결정했으면서도 일방적으로 주입된 서쪽을 대입시켜 생각한다. 

자작나무와 서민가옥
이런 간극은 늘 존재한다. 우리에게 제공된 여행안내지에 적힌 것과 실제로 보는 러시아의 모습은 천양지판 일 수 있다. 더구나 '바이칼 호수 주변을 달리는 대륙 간 열차에서 시베리아의 자작림과 브리야트 자치구역을 보라'는 것과 '전형적인 러시아와 몽골의 자연을 감상하라'고 소개돼 있는 여행안내문은 현질과 같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지는 드넓은 초원과 야생화 지역을 감상하라'는 말에 한 가닥의 기대를 떨치지 못한 채 적어도 70시간 41분간은 긍정의 자세로 보낸다 한들 손해란 없다.

그러나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본 풍경은 감동받을 만큼 멋지지 않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은 대책 없이 미화된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강의 지류를 지날 때 사람들이 내지른 탄성은 진심이었다. 우람하지는 않으나 울창한 숲이 계속됐고, 길고 풍부한 물줄기가 이어졌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시베리아 나무들은 추위 때문인지 통통하게 자라기보다는 너도나도 ‘햇볕을 바라며 대부분 위로만 치솟은 키다리들이었다. 

지나면서 바라본 가옥들은 이를 잘 반영해주고 있었다. 대도시의 역사(驛舍) 말고 달리는 열차 안에서 본 가옥들은 대게 좁다란 판자조각을 이용한 목조가옥이었다. 콜타르를 덧칠한 검은색이든지 하늘색 페인트를 칠한 판자 집들이 많았다. 빼빼나무에서 얻은 조부장한 판자를 사용하여 지은 서민풍의 목조 가옥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자연이다. 사람도 나무도 대자연의 일부다. 생명은 어디서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존재가치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게 인공조림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자라고 있는 시베리아의 나무들은 혹한을 견디며 생존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모습일 거다.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모습도 그런 단면을 보여준다. 좁다란 널빤지를 만들어 가옥을 짓는데 사용하고 그것이 제일 흔한 시베리아 철도변에 늘어선 주거형태인 것 같았다. 


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8434pj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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