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실체를 가진 허상을 만났을 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솔라리스> 정지원 기자l승인2019.01.24l수정2019.01.2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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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잘라 환풍구에 붙여 놓으면 바람에 흔들리면서 마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소리다. 그러나 이성을 내려놓고 감각에만 충실하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리면, 우주에서도 지구의 나뭇잎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신비의 행성 솔라리스는 인간에게 진짜가 무엇인지 묻는다. 

아버지의 집을 방문한 주인공 크리스는 솔라리스를 탐사하고 돌아온 조종사 버튼을 만난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버튼은 솔라리스의 표면에서 움직이는 거품을 관찰했는데, 갑자기 거품 덩어리가 모여들어 오래전에 죽은 아들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크리스는 단지 개인적인 착각일 뿐이라며 웃어넘긴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크리스에게 호통을 치며, 아들의 부족한 인간성을 나무란다. 크리스는 이성을 신봉하는 과학자다. 그는 과학의 이름으로 현상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연구의 존속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솔라리스로 향한다.

솔라리스를 관찰하기 위해 만들어진 85인승의 우주정거장에는 기바리안과 스나우트, 그리고 사토리우스라는 단 세 명만의 과학자만이 남아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크리스는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 스나우트를 억지로 붙잡는다. 스나우트는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거라고 전제하며, 주인공에게 놀라운 사실을 전한다. 

솔라리스는 과학자들에게 매일 밤 ‘손님’을 만들어 보낸다. 그 손님들은 과학자들의 과거와 관계가 있는,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존재할 리가 없다. 항상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과학자들은 그들의 신체를 분석해 인간과는 다른 형질의 ‘인공물’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가짜 연인, 가짜 아들, 가짜 딸들은 외모도, 목소리도 진짜와 다를 바 없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다. 

▲ 사진=네이버 영화

과학자들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기바리안은 자신조차 신뢰하지 못하고 손님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지도 못한 채 자살해버렸다. 스나우트와 사토리우스도 역시 손님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진리의 규정을 어기고 매일 밤 방으로 찾아와 잊고 싶었던 과거를 되새기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 때, 이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과학마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과학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결국은 인류 자신을 비춰 보기 위해 만든 거울일 뿐이다. 사랑이나 희망과 같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은 이론으로 해석할 수 없는 신비다.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짧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들이 실험으로 밝힌 그들의 정체는 실체 앞에서 잿더미가 된다. 인식의 범위가 무의미해지는 광막한 외계 행성에서 마주한 부조리의 정면에 서서 인간은 무거운 선택을 해야 한다.

사물을 보고 진짜와 가짜로 구분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판단이다.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은 부활할 수 없다고 해도, 그래서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라도, 인간은 눈앞에서 사랑을 말하는 연인을 뿌리칠 수 없다. 솔라리스는 인간에게 묻는다.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만약 허상이 실체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허상을 보고 생긴 감정도 가짜인가? 감정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는가? 
 
크리스는 결국 아내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나우트와 사토리우스는 손님들을 말살하는 연구에 성공한다. 그리고 몰래 크리스의 뇌파를 솔라리스로 쏘아 보낸다. 그러자 아내는 사라지고, 손님들도 사라지고, 솔라리스의 표면에 몇 개의 섬이 나타난다. 남은 것은 그의 결정뿐이다. 이대로 지구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솔라리스에 남을 것인가.

▲ 사진=네이버 영화

엔딩에서 크리스는 아버지의 집에 있다. 관객은 그가 지구로 돌아와 아버지를 만났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갑자기 집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비가 내린다. 허상이다. 그리고 줌 아웃으로 솔라리스의 전경이 나타난다. 크리스는 결국 지구를 그리워하는 솔라리스의 인간으로, 허상 속의 인간으로 남은 것이다. 그는 왜 솔라리스에 남았을까. 왜 거짓인 줄 알면서도 거짓을 선택한 걸까.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결핍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결핍을 채우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발휘하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나 불안감이 엄습한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추동한다. 비록 허상이라도 매일 실체로 되돌아오는 솔라리스는 모든 것이 하루하루 소모되기만 하는 지구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누구나 진리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인간도 언제나 거짓의 돌파구를 찾아 헤맨다.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형태로 하루가 다르게 거짓을 쏟아낸다. 그들의 눈이 마침내 우주를 향했을 때, 그곳에서 솔라리스를 발견한다면, 그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이다.
 
상처를 입기 이전과 이후의 인간은 완전히 다르다. 몸에 흉터를 새기게 된 인간은 그만큼의 세상을 깨닫는다. 그리고 달라진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핍으로 텅 비어버린 가슴 속의 공허를 깨달았을 때, 그곳으로 매일 밤 ‘손님’이 찾아와 잠든다면, 거짓의 온기가 스며들어도 차라리 미소를 짓게 되리라.


정지원 기자  camus29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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