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들 칼럼] 중용은 구즉궁久則窮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도

인공지능과 중용 Vol.8

  • 입력 2018.07.13 19:19
  • 기자명 고리들 <인공지능과 미래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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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AGI의 출현이 2024년으로 예측되었다고 했는데, 그 AGI는 아마도 200여 분야에서 각기 잘 교육받은 IQ 200 정도의 인재들을 하나로 모은 수준을 능가하도록 인간의 일을 잘할 것이다. 이런 AGI의 등장과 함께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감정들이 미발未發하는 성인군자의 중中이나 좋은 타이밍의 시중時中이나 신중한 빅데이터 기탄忌憚이 인간의 영역을 떠난 초지능 AGI 조언자들에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영역에서는 행복한 소인들의 무기탄無忌憚 시대가 온다고 말했다. 이제 기탄없이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기탄없이 모든 평가를 무시하면서 평범해질 용기로 도파민 신독을 해보자. 특히 교육계에서의 자유와 무기탄이 우선 필요하다. 그래야 필자의 선친과 함께 동작동 동쪽 묘역에 계신 ‘김대중’이 말한 행동하는 양심들을 기를 수 있다. 

교육계가 기탄을 중용의 도로 삼으면 이 세상은 ‘케네디’가 단테의 신곡에서 인용한 것으로 알려진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이 된다. 지금의 헬조선이란 표현과 미투운동을 다음 문장과 함께 생각해보자.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혹시 조금 뜨끔하지 않는가? 앞의 단테의 말과 다음 아인슈타인의 말에서 중용적인 느낌을 느껴보자. “세상을 파괴하는 자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들이다.” 

늘 공교육의 기탄忌憚형 교육을 비판하는 강의를 하는 필자는 중용이 중립이 아님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공교육의 기탄형 교육은 아이들의 긍정적 무기탄의 에너지 도파민과 날카로운 비판의 에너지 노르아드레날린의 조화를 말살해왔다. 그리하여 양심은 있으나 행동이 어려운 사람들을 길러냈다. 중용을 행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중립적 방관자를 길렀다. 시간표에 숨 막히게 박힌 국영수사과 커리큘럼과 상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꽉 찬 기탄교육은 해충과 잡초 때문에 뿌려지는 DDT 등의 농약을 농토에 살포해온 효과와 비슷하다. 정작 해충에게 가는 농약은 0.1~0.3%인데 나머지는 땅과 바다와 농부의 피를 오염시켰으며 해충과 잡초들은 농약에 내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타민족 대량학살의 독가스로 시작된 역사를 갖고 있는 농약들은 생명체들의 면역력과 도파민을 죽였고 치매와 암과 파킨슨병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바다의 생선들을 먹기 어렵게 했고 고래들을 죽이고 있다. 필자는 인공지능 AGI가 농약의 빅데이터 역사를 모두 정리하는 날이 올 것이며 역시 지금 우리 공교육의 해악을 낱낱이 지적할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 날이 와버린 이후에는 이미 스스로 뜨거운 삶의 지옥에서 농약과 공교육을 원망할 사람들이 많기에 필자는 중용을 기탄忌憚으로 훈화하는 위성지학爲聖之學이 아니라 무기탄無忌憚으로 창조적 파괴를 하는 위행지학爲行之學으로 재해석하는 중이다. 중용이 오늘날의 행동에 관한 고전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어지는 다음 장구들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도 심각한 문제점이 보인다. 

子曰 中庸其至矣乎 民鮮能久矣 필자는 이 문장의 해석도 해설도 주희나 도올과 다르게 하고 싶다. ‘공자 말하길, 중용은 지극하고 오묘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능히 오래 지키기 어렵다’로… 즉 노자의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의 개념이 이 문장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심이 있다. 이 문장은 이런 뜻이어야 나는 공자의 수준을 인정할 수 있다. 역경의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구즉궁久則窮은 마치 4계절처럼 순환하는 세상의 이치이다. ‘슘패터’는 구즉궁久則窮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창조적 파괴가 없이는 자본주의가 끝난다고 했다. 그렇게 그 많던 위대한 기업들도 사라지고 아름다웠던 기억들도 아스라이 사라졌다. 벌써 첫사랑의 향기도 최근 시작한 사랑의 향기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구즉궁久則窮의 현상이 가장 많은 곳은 오래된 화장실이다. 후각은 너무나 쉽게 지쳐서 새로운 바깥바람 냄새가 오기 전까지 조금 전 똥냄새를 잊는다. 같은 냄새에 더 민감해질 필요가 없으니 두뇌는 분석의 에너지를 아낀다. 시각을 잃어버렸으나 믿지 않는 병이 있는데 그들은 집안의 가구를 옮기면 자꾸만 부딪치다가 자기 눈의 이상을 깨닫는다. 파충류를 포함하여 굉장히 많은 종류의 동물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에너지를 아낀다. 먹는 것들은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중용의 냄새와 맛은 그렇게 실존과 생존의 이익을 향한 본능과 함께 재빨리 사라지는 종류의 도이다. 이런 해석은 저 뒤에 입맛을 잃어버렸다는 선능지미鮮能知味와 연결된다. 물고기가 가뭄이 와야 물의 고마움을 절감하듯 우리는 구즉궁久則窮 이후에야 중용을 운운한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과유불급過猶不及이 2번 반복되고 있다. 필자는 지자知者 현자賢者 우불초자愚不肖者의 과유불급이 원래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도 나름대로 궁즉변 변즉통을 했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즐기며 먹었으나 너무 오래 즐기고 사랑하던 통즉구 과정에서 창조적 파괴를 역동적으로 지속해야 함을 깜박하고 궁즉변에 이르고 보니 과하거나 불급한 처지가 된 것이다. 人莫不飲食也 鮮能知味也 그렇게 다들 뭔가 열심히만 집어먹거나 주워듣거나 하다 보면 공자가 말했던 각각의 망태罔殆에 빠지게 되어 중용의 맛을 읽게 된다. 마치 스승과 선배들에게 자꾸 배우려고만 하다가 자기만의 생각이 부족하여 새롭고도 자기다운 진로를 찾기가 막막해지거나(學而不思則罔) 성공의 안정감(휴브리스) 속에서 나름대로의 생각에만 빠져서 공상의 솜사탕을 잔뜩 먹다가 새롭고 위태로운 위기를 마주하게 된다(思而不學則殆). 그렇게 중용의 도와 이상적 연인은 늘 우리의 곁을 떠나려고만 하는 바람과 같거나 무뎌지는 향수와 같다. 子曰 道其不行矣夫 도는 그래서 그렇게 행하여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필자의 새로운 해석들은 위와 같다. 도올의 해석대로 민선능구民鮮能久가 안회처럼 3개월을 지속했던 정성을 생각하며 외친 말일까? 경전은 공자의 삶과 생각을 다 담을 수 없다. 다른 책에 있는 자료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중용은 중용만의 흐름으로 해석한다면 필자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보자면 ‘능히 오래가지 못한다네(民鮮能久矣)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구나(道其不行矣夫)’라고 외친 공자의 진심은 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한탄이 아니었을까? 그저 예전 요순시절에는 중용의 도가 잘 지켜지다가 요즘 버릇없는 시대에는 이 모양이구나일까? 혹시 역경의 구즉궁久則窮의 원리를 잘 알았고, 무수한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서 창조적 파괴의 어려움까지도 잘 아는 공자의 외침을 제자들이 너무 편협한 맥락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수준에서 편집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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