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택의 교육에세이] 사랑은 기다림

  • 입력 2018.07.02 16:30
  • 수정 2018.07.02 16:32
  • 기자명 기노택 前 송곡여자중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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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이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퇴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어둑어둑해진 시간에 나는 농작물에 비료를 주며 잔뜩 마음이 들떠있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너풀너풀 쑥 자란 농작물을 보고 신기해할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신바람이 났다. 모종삽으로 비료 두 삽을 퍼서 주고도 욕심을 내서 반 삽을 더 주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학교는 즐겁고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고 복도 창틀에 다양한 화분을 가꾸고 학교 주변에는 농작물을 심었다. 작물을 심을 땅이 부족하니 휴일마다 뒷산에서 흙을 파서 작은 수레로 운반해 화분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화분에 상추, 오이, 고추, 가지, 토마토, 조롱박을 심고 화단에는 참외, 수박, 호박을 심었다. 고추를 얼마나 많이 심었던지 운동부 선수 숙소에서 김장을 담가도 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애정을 가지고 가꾸는 것은 오이다. 상쾌한 아침 등교 시간에 주렁주렁 열린 오이를 보며 즐거워할 학생들의 모습에 마냥 행복해지는 것이다. 수학여행 중 아름다운 남해안을 구경하면서도 무럭무럭 자라날 농작물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잔뜩 기대에 차서 동이 트면서 학교에 와보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서 아침 이슬을 머금은 채 바람에 너풀거리며 인사를 해야 할 작물들이 잎이 축 늘어진 채로 있었다. 물이 부족해서인가 하고 흠뻑 물을 주고 얼마 후에 와보니 아찔한 광경에 맥이 탁 풀렸다. 오이는 거의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기질이 강한 토마토만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 잊고 있었던가! 비료를 과하게 주면 시들어 죽는다는 것을!
알이 스스로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외부에서 깨면 계란 후라이가 된다는 말을 자주 쓰곤 했다. 스스로 자라도록 기다리지 못하고 과하게 채근하면 해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욕심이 과해서 일을 망치고 만 것이다.

선영이라는 학생이 친구를 괴롭혀 폭대위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 후로 개인적으로 불러서 상담을 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때부터 선영이의 태도가 차갑게 변했다. 인사도 받지 않고 나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쳐간다. 이름을 부르고 칭찬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선영이는 축구를 잘한다. 그래서 축구하는 걸 볼 때마다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는 것이다. 선영이의 차가운 태도에 화가 났다. 나도 그냥 무시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아침 등교 시간에도 점심에 식당에서 만나도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선영이에게 변화가 생겼다. 내가 무시하고 지나치면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요즘은 왜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냐고 몰래몰래 바라보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지 못한 것이다. 선영이가 나를 무시하고 지나쳐가면서도 내 인사를 그리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린이는 칭찬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 그리고 사랑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던 그 많은 세월 동안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부단히 채근하고 닦달하며 상처 주고 기다려주지 못했을까! 요즘 산책을 하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면 가슴이 쫄깃해진다. 

기노택 前 송곡여자중학교장
기노택 前 송곡여자중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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