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면 무섭지만, 알면 그만큼 대비할 수 있는 지진

국내 내진설계 전문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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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가 보낸 최초의 여자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와 결혼 했고, 남편이 절대로 열지 말라고 한 상자를 '호기심'으로 열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질병, 질투, 미움, 복수 등이 튀어 나와 평화로웠던 인간세상에 불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상자의 맨 밑에 있던 한 가지가 인간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바로 희망이었다. 신이 노하고 바다와 강을 넘치게 하면서 땅을 흔들어 지진까지 만들어도 희망이 인간의 생명을 잇게 했다. 모르면 끝없이 무서운 존재, 하지만 알면 그만큼 준비할 수 있는 자연현상인 지진. 여기 국내 내진설계 기술력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한 학자가 있다. 

지진 - 공포의 대상이 아닌 대비대상
지진설계에서는 지진을 잘 견디는 내진구조, 지진을 잘 피해가는 면진구조, 혹은 자체적으로 지진의 에너지를 받은 건물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제진구조가 있다. 이런 지진관련 설계기술은 전세계에서 일본이 단연 앞서 있지만 오상훈 교수는 아직도 우리의 기술로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지난 2016년 9월12일 규모 5.8로 발생한 경주지진은 한반도의 많은 사람들에게 지진공포를 안겨다 주었다. 본진 이후 400여회가 넘는 여진으로 공포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에 미디어를 통해 이리저리 움직인 전문가 중 부산대 오상훈 교수는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사실(Fact)을 전달하는데 주력했다.

이처럼 오 교수는 부산도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는 아니니 양산단층의 지진(짧은 주기의 지진대)과 함께 큐슈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지진(긴 주기의 지진대)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지진은 역사의 기록처럼 300~400년에 한 번씩 많이 나타났고 2000~2100년 전후가 지진이 많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특히 오사카 인근 난카이(남해) 해구 지진이 가장 컸는데 이와 유사한 지진이 20년 이내 일어날 가능성을 70%나 두고 있다.
 
청년의 정의감이 국가의 경쟁력으로
오상훈 교수의 이력은 독특하다. 동경대 대학원을 거쳐 포스코 산하 한 연구원에서 10년간 활동했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교수직으로 이어온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상훈 교수는 4남매 중 장남이다. 동래에서 태어나 해운대 대천(현재 좌동) 인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천은 부산이지만 부산 같지 않았다. 군사보호지역으로 초가집 돌담도 흔하게 볼 수 있던 동네였다. 학교에서는 도시생활, 하교 후 도시내 시골생활을 즐기며 도시민으로서는 흔하지 않은 감성을 키웠다. CEO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경험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남자로 태어나 이것저것 다 해봐라며 아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오 교수는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탁구나 럭비, 윈드서핑 등 운동을 해 가면서 건장한 체격을 유지했다. 고교시절에 흔히 공부도 잘 하고, 교실 제일 뒤편에 모여 앉는 노는 애들과도 친한 그런 의리의 반장이었다. 오 교수는 83학번으로 한양대학교로 진학한 뒤 건축사를 배우면서 새로운 진로와 도전을 꿈 꾸었다.  

하지만 진로결정처럼 동경대 대학원으로의 진학이 쉽지만은 않았다. 담당교수(아키야마 히로시)는 한 국적의 한 학생만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칠전팔기의 뚝심을 가졌던 오상훈 교수는 어학교로 입학해 3개월 단기비자로 생활하려 했다. 다행히도 담당교수와 면담할 기회가 있었다. 오상훈 교수의 노력에 담당교수는 감동해 시험기회를 줬다. 조건이 있었다. 단 1회의 시험기회만 가지며 불합격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오 교수는 5개월 후인 12월에 시험을 통과했고 이듬해 4월부터 아키야마 히로시 교수의 제자로 유학의 기회를 가졌다.

동경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까지 7년의 세월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니 바로 취직하기에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결국 6개월간 모교 연구교수직으로 활동하다 1998년 포항산업과학연구원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누구라도 보이지 않는 노력을 폄하하진 말아야
마지막으로 오상훈 교수의 계획을 들어봤다.
"일단은 지진없는 나라 건설이라는 허무맹랑한 계획이 있었는데 이미 지금보니 60% 이상이 해외건설 프로젝트로 움직이는 현실이더라고요. 결국 미국이나 독일이 갖고 있는 고급설계기술의 10% 시장만 국내로 갖고 오자는 작은 목표를 갖습니다.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고 내 나라의 내진설계 기술을 인정받는 것이 꿈입니다."
오상훈 교수의 눈에는 아직도 젊은 시절 열정과 '정의감'이 불타고 있었다. 적어도 다른 나라에는 지지 않는 기술력을 갖겠다는 다짐, 스스로 정도를 벗어난 삶은 살지 않으려는 노력이 회초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정부의 예산으로 움직이는 상아탑의 연구자로서, 그리고 존경스러운 한 스승으로서 오상훈 교수의 행보가 빛이 되어 정의롭게 이어지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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