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두만강 동쪽 ‘연추(煙秋, 크라스키노) 마을’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 입력 2013.06.11 13:38
  • 기자명 이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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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두만강 동쪽
‘연추(煙秋, 크라스키노) 마을’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성근|동북아시아연구소장, 제 9·10대 국회의원, 前 한성대·배재대 총장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던 연해주는 그후 반세기 이상 우리 민족과 단절됐던 곳이다. 이제 새로운 동아시아 경제 발흥의 기점으로서 그리고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의 역사 단절을 복원하는 고리로서 그 중심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와 관련한 동북아시아연구소 이성근 소장의 글을 2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註)

‘카자흐스탄’에서 쓰러진
홍범도 장군의  넋 승화시키는 21세기의 길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짙어지고 있던 1937년, 연해주에 거주하던 25만 명의 우리 동포들은 다시 한 번 엄중한 시련을 겪었다.
러일전쟁으로 1910년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강대국들이 전쟁에 여념이 없을 때 중국에 대한 침략 압력의 강도를 높여 나갔고 전쟁이 종반에 접어들고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로 수만 명의 간섭군을 파견해 극동에 몰려있던 백계지원의 각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1922년까지 주민보호를 핑계로 연해주에 주둔하는 등 일본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만주 일대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계속 추구하다가 1931년에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하면서 마지막 제위를 차지하고 있던 어린 ‘부의’를 20년 만에 찾아 1931년 ‘만주국’이라는 ‘청’왕조를 계승하는 허수아비 정권을 출범시켜 사실상 중국을 남북으로 분단하는 사태를 연출하고 남부 중국에 대한 침략정책을 지속하면서 ‘만주국’과 ‘몽골공화국’ 간의 국경분쟁을 가장한 소위 ‘모노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 1939년이었다. 이 전쟁은 형식상으로는 만주국과 몽골 간 전쟁으로 위장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러시아 간 전쟁이었다.
이상하게도 전쟁 당사자국인 몽골공화국과 만주국으로 갈린 ‘몽고족’끼리로 구성된 양측의 사상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는데 몇 개월만의 전투에서 소련군의 사상자가 2만여 명, 일본군 사상자가 4만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대리전쟁이었다.
이에 중화민국에 대한 침략전쟁이 한창인 때에 소련과의 전면전이라는 두 개의 전선형성이 무리라고 깨닫고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을 거두었다. 소련도 나치군의 폴란드 급습으로 긴박해진 유럽전선 형성에 다급한 나머지 일본과의 전면전을 계속하기는 거북해 일단 대일전(對日戰)을 접었으나 극도의 긴장관계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소련·일본 간 군사적 긴장관계를 배경으로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의 한인들이 일본의 대소 작전에 활용될 가능성을 들어 1937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전원 강제 이주시키는 폭거를 가했다. 
한때 레닌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피스톨까지 받았던 의병대장 홍범도 장군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송된 홍범도 장군은 그 곳 조선인 극장의 수위로 있다가 기물을 훔치러 들어온 현지인 불량청년들과 일흔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격투를 벌이다 병을 얻어 조국 광복의 날을 4년여 앞둔 1941년 객사하고 말았다.

연해주는 우리에게 왜 중요한 곳인가
시베리아가 화학원소표로 기재된 모든 광물자원, 산림자원 등을 방대하게 보유하고 있는 자원의 보고(寶庫)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방대한 자원들을 태평양 지역으로 반출할 수 있는 거점이 연해주일 수밖에 없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직선 종착역이 두만강 하구의 하산역이고 그 지선의 동쪽 종착지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다. 
한편 동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들의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와 유럽으로의 육로 운송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출발지는 연해주의 항구들일 수밖에 없어 앞으로 극동 중심부의 물류 중심지로 부상할 곳이 연해주다. 그리고 이들 항구들은 모두 우리 영토에서 최단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들의 전통적 한인마을들이 모여 있던 연추(크라스키노)에서 한 시간 거리 내에 중국의 경제특구 및 북한의 자유경제무역지구가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훈춘, 연길, 용정, 도문이나 북한의 나진·선봉 지구, 샛별, 온성, 남양구, 삼봉, 회령 등이 모두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 내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연해주 남부를 경제활동 중심지로 설정할 경우 그 영향력은 중국의 동북부, 함경도 북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21세기 자원의 수입을 해외에 크게 의존해야 할 우리 경제조건으로서는 자원 물류 중심지인 연해주의 경제적 중요성은 날로 증대될 것임이 명약관화하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해외 이민길을 개척하기 위해 파라과이의 오지 산림지역에 이민 지원 농민을 투입했다가 실패한 경험도 있고 아르헨티나에는 지금까지도 영농후보지로 확보해 놓은 토지가 놀고 있다. 그러나 지난 40년 동안 해외로의 이주는 계속돼 오늘날 해외동포 700만을 헤아리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리던 고국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버려졌던 동포가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50만 고려인들이었다.
이제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지기는 했으나 너무 오랜 기간 단절됐던 역사가 그들을 아직도 억압하고 있다. 이민 3, 4세가 되면서 세월의 풍상과 환경적 조건은 이제 그들의 정체성과 의식마저도 퇴화시키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냉전시대로 상징되는 단절의 슬픈 역사를 새로운 희망의 역사로 갈아엎는 도정에서 우리들에게 이들 고려인의 존재는 보석과도 같은 귀중한 자산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그동안 낯설었지만 앞으로 중앙아시아 지역과 러시아 전역으로 우리 삶의 테두리를 넓혀 나가는 데 있어 그들은 우리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안타까운 것은 그들 4, 5세들이 한국인 후예들로서 정체성이 옅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럴수록 그들을 우리와 같은 문화적 유대와 생활영역권으로 묶어 삶의 터전을 윤택하게 해주어야 할 모국으로서의 의무가 있다.
그와 같은 생활 네트워크의 중심고리를 연해주에 건설해야만 한다. 연해주는 러시아 언어권이고 그들과 가장 밀접한 생활권이며 또한 그들에게도 달려가기 쉬운 이동 경로의 징검다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해주를 통해 국내에서 성장한 세대들과 이질적 환경에서 성장한 고려인 후손들이 함께 어울려 삶의 터전을 넓혀갈 수 있는 동아시아 유통의 중심지로서 연해주가 활용되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의 새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연해주의 번영은 통일의 날을 앞당기게 하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통일 이후의 삶의 영역 확대에도 반드시 필요한, 한민족의 새 역사 쓰기 현장으로 탈바꿈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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