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한국적인 만화가 이두호

‘바지저고리 만화’, ‘머털도사’로 대표되는 한국 만화계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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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저고리 만화”
 만화가 이두호,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머털도사와 만화 객주, 임꺽정으로 유명한 한국 만화계의 거장이다. 그 스스로 ‘바지저고리 만화’라는 표현을 즐겨 할 정도로 한국사와 민중과 관련한 만화에 아낌없는 애정을 바치고 있는 그에게서, 그의 묵직한 만화보다도 더한 인간미와 겸손함을 가슴 깊숙한 곳까지 전달 받았다. 따로 그의 만화세계를 묻지 않아도 될 만큼, 그의 외모와 인품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원래는 화가를 꿈꾸었어요. 그래서 사실 한 2년 동안은 지인에게 일을 맡기고 제가 바랐던 회화를 원 없이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저 깊은 곳에서 아직까지 만화에 대한 그리움이 나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거예요. 결국 다시 만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 마음자세부터가 남달랐어요. 무슨 만화를 그릴까, 어떤 만화가가 될까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진작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그 쪽으로 가자고 하는 데는 큰 시간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뭐 역사 쪽에 엄청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사에 대해 보다 더 많이 공부를 했을 걸 하는 아쉬움이 지금까지도 사실 가시지가 않아요. 그렇다고 그때 그렇게 대단한 결심을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바지저고리나 그리자 했지요.”

“머털도사의 탄생”
 선생님에게서는 말 한 마디, 표정 하나 하나마다 따뜻함이 흘러 넘쳤다. 만화가 이두호 하면 누구나 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캐릭터가 바로 우리의 개구쟁이 도사 ‘머털이’다. 당연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머털이가 태어나게 되었는지. 귀를 쫑긋 세우려 하는데, 의외로 대답이 단순했다.
 “당시 제가 머털이를 처음 그릴 때는 엄청 바빴을 때였어요. 무슨 제 밑에 문하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심부름하는 애들이나 있는 정도였죠. 7~8개 작품을 한꺼번에 연재했을 때예요. 일주일에 2일은 꼬박 밤샘이 아주 정해져 있었죠. 그때 ‘새벗’이라는 잡지로부터 연재 부탁이 왔던 거예요. 제 어린 시절에도 봤었으니 아주 오래된 잡지였죠. 하여튼 이래저래 감쪽같이 시간이 흘러 마감 하루 전에야 바로 다음 날이 원고를 넘겨야 하는 시간인 것을 알고, 부랴부랴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죠. 어린 시절 집을 왔다 갔다 하려면 큰 산을 넘어 다녀야 했는데, 거기 어디 산마루쯤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었어요. 그 위에 서면 우리 고향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죠.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그랬거든요. 도술을 부릴 줄만 알면 한 번에 슝 하고 날아갈 텐데 말이야 하고요. 그렇게 해서 산꼭대기 구름 위의 바위봉에 사는 머털도사 이야기가 나오게 된 거예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마감 하루 전에 갑자기 태어난 셈이죠. 머리털을 뽑아 도술을 부리는 머리털도사라서 머털도사라고 이름 한 겁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원제는 “도사님 도사님 우리 도사님”, 6회 째 나갔을 즈음 기독교 계통의 잡지 성격 상 이름을 바꿔 달라고 해서 다시 나온 게 “옛날 옛적 털삼이”이다. 1년 반 정도 20회를 연재하고, 이후 소년경향이 창간되면서 이어지는 그 다음 이야기가 지금의 머털도사가 된 것이다. 아마 당시 새벗이 어린이잡지라서 공감대가 컸을 것이라고 한다. 애써 노력한 것은 반응이 시큰둥한데, 오히려 천덕꾸러기가 효자 노릇을 한다며 말을 건네셨다.

“젊은 만화가 이야기”
 이제 종이만화는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인터넷 웹툰의 시대다. 스스로 컴퓨터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선생님은 솔직함인지 겸손함인지 요즘 만화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셨다. 적응하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 않지만,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당연히 시대가 변하니 젊은 작가가 위주가 되어 가야지요. 여기 한국만화영상진흥원으로 옮겨와 좋은 점은 가끔 젊은 작가들과 뒤풀이자리에서 만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거지요. 저야 요즘 세대를 잘 모르니 그냥 들을 수밖에요.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고, 바뀐 만큼 더 앞서 가야지요. 제가 잘 모르니,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하라고 권합니다. 40년의 역사를 지닌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 제가 갔었을 때만 해도 만화라는 매체가 하나의 온전한 문화로서 이렇게 대접받고 육성되는 나라가 부러웠어요. 지금은 오히려 우리나라 만화가 자랑스럽기까지 하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왕 하는 거 젊은이들이 아주 철저히 한 번 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그리고 옛날 이야기”
 지난 해 봄 즈음 ‘머털이 한국사’ 전 10권이 드디어 완간되었다. 처음 김영사와의 약속은 4년이었다. 속으로 작심하기는 3년이었단다. 그런데 그것이 7년이 걸린 것이다. 연재라는 압박이 없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동안 만화가 개인적으로 혼자서 씨름한 작품들이 참 많았다. 스토리에 데생에 펜터치에 물감까지 모두 그의 소관이었다. 12가지 기법의 21가지 기인들의 이야기, 이두호의 “가라사대”의 경우는 한 만화책 안에서 파스텔, 수묵, 물감까지 다양한 실험이 들어갔다. 그렇게 수많은 밤샘의 나날들이 지나 이제는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고 싶다고 하신다. 아무 압박이나 제재도 없이. 만화가는 이제 날 좋으면 캔버스 하나 달랑 싣고 떠날 것이다. 수채화도 그리고, 유화도 그리고, 하고 싶은 만큼 맘껏 그리고 말이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옛날로 흘렀다. 한국 만화계의 큰 본보기인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씨 모두 그의 친한 후배였다. 허영만은 자기 작품을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한다는 의지를 가진 대단한 열정의 만화가였다. 둘리 김수정은 스스로 마음에 들 때까지는 절대로 원고를 넘기지 않고, 심지어는 인쇄소에 자신이 직접 마감 원고를 들고 갈 정도였다. 이현세 씨는 그 당시에도 만화계 스타였는데, 자기 독자들 하나 하나를 감사히 생각할 줄 아는 후배였다. 세 사람 모두 선생님의 마음자세를 바꿔 준 소중한 친구란다. 개인적으로 기자가 좋아하는 구영탄의 만화가 고행석 이야기도 나누었다. 정부 지원 하나 없이 자체 회비만으로 협회를 운영할 1997년 당시, 월 60만 원이라는 지금으로서도 큰 돈을 매 달 꼬박 꼬박 넣어주었다.

“나의 스승 한국 만화의 거장 박기정”
 이두화 만화가가 본격적으로 만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한국 만화계의 거목 박기정 선생님 덕분이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처음 찾은 출판사에서 그림을 받는 대신에 우선 좋은 분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한 것이 바로 선생님이었다. 그 당시 문화생은 지우기에서부터 시작, 먹칠과 펜터치를 거쳐 배경 하고 인물 하고 난 뒤에야 드디어 데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대번에 데생을 시키신 것이었다. 데생도 데생이지만 중요한 것은 원고료 자체가 틀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1년을 있으며 만화란 바로 이것이다 라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의 만화에는 스토리의 재미를 넘어 여기 저기 다양한 복선이 깔려 있어요. 단편적이지가 않고 기승전결이 분명히 다 나와 있죠. 순수회화부터 시작한 저로서는 사실 명암이나 원근 등 입체적인 것들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박기정 선생님의 구도는 지금 생각해도 참 참신한 것이었어요.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다리가 전면에 거대하게 나오고 사람은 그 사이로 자그마하게 표현한다든지 하는 선생님만의 독특한 화면을 처음 접했을 때 참 대단하는 말이 절로 나왔지요.”
 큰 실수도 있었다. 한 번은 나라에서 부탁한 홍보용 만화를 선생님이 쓰시고 자신이 데생했는데, 그 당시 소년중앙 창간에 맞춰 원고 청탁이 들어와 마침 그것을 샘플로 가지고 가 보여주었다. 다음 날 찾으러 갔는데, 글쎄 그만 출판사 측에서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 이름의 작품도 아니고, 더욱이 선생님이 채 보시지도 않았던 때였다. 한 달을 혼자 끙끙 앓다 어떻게 해서 겨우 선생님께 모든 것을 이실직고하고서 용서를 구하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명동에 호프집이 처음 유행할 때 둘이 진탕으로 취했다는 것이다. 그 때 이두호 만화가가 제자로서 스승 박기정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제자 중에 정말 괜찮은 놈 하나 나옵니다.” “그래, 누구?” “여기 바로 선생님 앞에 앉아 있지 않습니까?” 만화계에서 박기정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은 이두호 만화가에 있어 제일로 큰 행운이다.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열정”
 끝으로 기자와 만화가는 일본만화와 우리만화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자의 어린 시절은 ‘은하철도 999’와 ‘코난’, 그리고 바로 저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의 시기였다. 당시 국제만화전시회에서 좋아하는 만화가를 묻는 외국 기자의 질문에 이두호 만화가는 선뜻 데즈카 오사무를 칭했다. 그가 좋아하는 또 다른 만화가 시라도 산베이와 함께, 이 두 일본 만화가는 지극히 일본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우리 또한 철저하게 우리 식의 작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워낙에 유서가 깊은 일본이라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잘 가고 있는데 문제는 보다 깊이가 담긴 만화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한국 만화 전체를 밀고 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젊은 만화가들이 무엇을 하는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잘 알 수는 없지만, 무조건 잘 하라고 응원해주고 싶다는 것이 지금 만화가 이두호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토록 다정하고 부드러운 마음 속에는 또 그처럼이나 강직하고 뜨거운 열정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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