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의 본분은 바로 ‘국민식생활 향상’

김해에서 맛보는 특급 ‘한우전골’

  • 입력 2016.02.18 14:21
  • 수정 2016.02.19 15:21
  • 기자명 서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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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에는 다양한 프렌차이즈가 20대의 입맛을 사로잡는다면, 구수한 한우국밥으로 중장년층은 물론 젊은사람들의 입맛까지 아우르는 맛집이 있다. 김해는 물론 부산, 창원으로부터 평일 400명 이상, 주말 700명 이상이 찾는 ‘하동한우국밥’. 칼질을 모르면 배우고자는 마음이 필요하며, 음식점을 열고자 하면 최소한 남의집 생활하며 손에 칼 베이는 일 없을 정도로 익히고 준비를 마쳐야 한다고 전하는 신동원 대표. 호텔주방장에서 현재의 한우국밥집 사장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하동한우를 지키고자 시작

63빌딩 요리사 출신 신동원 대표가 국밥집을 연 것은 2004년 경. 그 때는 FTA이후 한참 수입고기가 들이려 준비중일 때였다.
원래 하동이 고향이었던 신동원 대표는 고향 친구와 이웃에서 많은 소를 키우고 점에 착안, 개방되면 한우농가 또한 위기에 봉착한다고 생각하고 ‘고향한우’를 지키고자 많은 날 고민했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할 사업에 고민하기를 3개월 여, 거주하던 진주를 떠나 김해에 와서 보니 이쪽 저쪽이 뒷고기 골목천지였다. 부근 도축장이 많았던 지역특성상 주말에 잡는 소만 수백마리. 김해사람 둘 중 한 명은 고기를 제대로 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진주에서 성공, 수십년 요리사경력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지만 바로 반응이 오지 않았다. 김해는 동부경남의 입맛으로 진주의 서부경남 입맛과는 사뭇 달랐다. “서쪽에서는 소머리 곰탕을 좋아하는데 여기는 기름기라고 안 먹더라고요. 도가니탕이나 머리수육, 혓바닥 같은 메뉴는 인기가 없었어요.”
소 한마리를 다 삶아내면서 고민을 하고 메뉴연구를 이어나갔다. 중요한 부분은 ‘한우 전체 부위’를 소화해낼 수 있는 그런메뉴가 필요했다.
먼저 생각한 것은 촌에서 인기 좋은 얼큰한 육개장과 장터국밥, 그리고 갈비탕이었다. 이리 저리 눈여겨 봐 온 경험과 자신의 노하우를 남고자 할 때 가장 자신있는 ‘한우전골’을 메뉴로 삼았고 육회비빔밥을 사이드로 뒀다.

그렇게 고민해 시작한 점포 이름은 ‘하동’을 지키겠다는 의미의 ‘하동한우국밥’. 
“전주나 함안 등 유명맛집 탐방을 해 왔었죠. 대부분 국밥집에서는 육수를 우려내기 위해 값싼 돼지뼈를 쓰더라고요. 아예 한우사골은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한우를 사용하면 국물맛이 월등해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첫 도전은 쉽지 않았다. 남기는 일이 아니라, 제대로 자리를 잡기 위한 작업이었다. ‘기존 국밥으로는 승부가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수입개방 후 한우고깃값이 폭등했지만 신 대표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우를 팔아주면 고향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콩나물을 푹 끓여 무시(무의 경상도 사투리) 큼직하게 쓸어 넣고 배추등 야채를 넣어 구수하면서도 얼큰한 국물을 냈죠.”
현재 하동에서 구매하는 고기는 하동축산매장을 경영하는 조카로부터 갖고 온다. 광양도살장에서 도축 후 등급판정을 받아서 해체작업을 하고 김해로 들고 오면, 600kg가 사흘이면 다 사라진다고.

한우전골이 대표요리

하동한우국밥에서 10년간 이어온 대표 메뉴는 ‘한우전골’이다. 2인분 이상씩 상에 나가는 한우전골은 육회비빔밥 맛보고, 라면 사리 넣고 밥 볶아 먹는 등 다채롭게 손님기호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요리이다. 
“구제역 당시 육회만 20접시씩 나가던 게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에요. 상당히 위기의식을 느꼈죠. 그래서 그 때 위기를 기회로 삼고자 했어요. 길거리에는 점차 육회 체인점이 확장될 때였지만 저희는 육회비빔밥으로 정면대응했습니다.”

오픈 후 수년간은 새벽까지 이어지는 장사였고, 현재도 자정가지는 영업하고 있다. 이미 3~4시간 자며 매장을 관리하는 ‘근성’은 습관처럼 배여 있었다.

하동한우국밥의 맛은 그냥 생기지 않았다. 신동원 대표는 이미 서울 63빌딩의 유명 한식집 ‘한가람’경력을 갖고 있는 요리사였다.
“그 때가 올림픽 하던 80년대 후반이었어요. 음식점 한가람에서 요리사들이 머리를 싸매야 했던 적이 있죠. 상부에서 여름만 되면 나오는 ‘개고기태령’에 대체할 음식을 만들라’는 오더가 떨어졌어요.”
이에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그중에 결국 8명의 요리사가 의견을 모아 만든 한우전골은 서울입맛에 맞게 들깨와 양념장을 풀어 넣고, 깻잎과 양지머리, 사태 등이 들어가 큰 인기를 끌었다. 

 

경영 경험은 주위 사람들 봉사하며 터득

31살 결혼 후 자신의 사업이 필요하다고 느낀 신 대표. 1994년에 사촌동생네의 부탁으로 고향 하동 부근으로 내려왔다. 진주에서 시작한 ‘길목숯불갈비’는 마이더스의 손을 거쳐 성공적이었다. 2년도 못 되어 몫돈이 생기자 사촌은 가게를 형이 가지라며 몫돈만 갖고 빠지려 했다.
“그 때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뭔가 뺏았겼다는 찜찜한 기분도 있고요. 결국 그래서 사촌이 원하는 사람에게 팔아라고 결정권을 떠넘겼죠.” 
이후 사천으로 떠났다. 스카웃제의가 있었고 1년간만 있어주기로 했다.  그러다 다시 사촌의 부탁으로 진주 대학병원부근에서 ‘우이동불고기’를 차렸다. 12년간 이어진 갈비와 불고기 장사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서비스에서는 많은 점이 부족하다고 설명하는 신 대표. “어느순간 페이스북이나 SNS를 통해 소문이 나면서 점차 손님이 많아졌고, 급기야 줄 서는 대기 손님이 생겨도 딱히 해 드릴게 없었어요. 방송도 겹쳐서 나가고 정신없이 손님들이 밀어닥쳤죠. 한데 서비스 문제로 오히려 망신살이었어요. 뼈저린 교훈을 얻었죠.”
그렇게  신 대표는 대박집의 반열에 오르고도 서비스의 질에 대한 책임감으로 다시 ‘초심’을 갖고자 한다.
“이전에 남의 집에 세를 내고 장사할 때, 얼마나 서럽게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해요. 여기는 이미 100년 장사를 생각하고 시작했고, 그만큼 제 열과 공을 들였어요. 지금은 너무 많은 정열을 쏟아 타버린 ‘마른장작’같은 느낌이지만, 아직도 음식에 맛을 유지하는데는 제가 있어야 하거든요. 봄,여름,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만큼 음식의 맛도 변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한결같이 유지하는가가 저의 숙제이죠.”

신 대표에게는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대부분 ‘프랜차이즈를 내라’고 이야기하며 달콤한 제안을 하지만, 신 대표는 당분간 생각이 없다. 프랜차이즈를 섣불리 시작하면 ‘맛의 퀄리티’가 낮아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 전성기에서 요리사 월급 300대는 150대 이하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손재주 좋은 많은 요리사를 잃었어요. 예전 호텔에서 원재료비 38%에 시말서를 적은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경영’부분에서 철저하다는 것을 알수 있었어요.”
신동원 대표는 앞으로 장대한 포부를 전했다.
“그 동안 자리를 잡는데 집중해 왔고 이미 10여년 해를 넘겼으니 본업 요리사로 돌아가 매년 1가지씩 메뉴를 추가하고 반응을 살피고자 합니다. 창조가 곧 저의 기쁨이니깐요.”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찾는 하동한우국밥. 국밥 한 그릇에 떠다 내는 정성과 정, 그리고 남모를 노력의 댓가가 다 담겨 있었다.

<인물인터뷰>
신 대표의 고향은 새마을, 무궁화, 남도해양관광열차등이 지나가는 간이역 정취의 북천역 부근이다. 가을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코스모스 축제시기에 방문한다. 
땅도 없고 소 한마리 없었던 5남 3녀 중 4째로 태어나 남의 소를 먹여주는 생활을 했다. 그 중 소 풀 뜯어 먹이러 가는 일은 신 대표 차지였다.
“아침에 소 먹이러 산에 들에 데리고 가잖아요. 한참 풀 뜯어 먹에 놔 두면 나중에 소 배가 불쑥 올라와요. 그럼 내가 먹는 것도 아닌게 너무 기분이 좋아지는거에요.”
어릴 때부터 소와의 연을 깊게 맺은 후 현재까지도 그 연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고등학교 진학시 신 대표는 가까운 진주의 진주고나 대아고, 동민고를 진학하고 싶었지만 꿈도 못 꾸고 고향 하동의 옥정고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옥종고로는 진학하기 싫었어요. 진주로 나가 좀 더 넓은 물에서 놀고 싶었죠.”
오갈 데 없어 고민이 깊어지는데 부산으로 먼저 간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방학 때 친구가 있는 부산으로 가 보니 남포동 ‘오륙도 불고기’라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신 대표는 “친구가 몰래 손님이 남긴 소갈비를 몇개 챙겨놨다가 주는데 너무 맛있는거에요. 그게 제가 처음으로 맛본 소고기였습니다. 달달한 국물의 불고기, 시큼새큼한 식초를 뿌려 먹는 냉면, 요상한 맛의 마요네즈까지… 이전 경험하지 못한 천상의 맛이었죠.”라며 침을 삼키며 말했다.
맛있는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든든한 친구가 있어 같이 일하고자 했고 그렇게 1980년에 첫 일을 식당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첫 3개월은 끝없는 배깎이 신세였고, 궂은일은 다 도맡아 하며 배웠다. 불고기 재우고 갈비 두드리는 것도 보기만 하고 건드리지 못하자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갈 것을 마음먹었다.
‘그래, 여기도 좋지만 좀 더 큰 물에서 제대로 배워 보자’
숙부님이 계신 영동시장(현재 반포동) 부근을 찾았다. 취직을 하겠다고 이야기 하고 며칠 지내며, 구인광고 뒤지며 적당한 식당을 찾았다. 당연히 잠자리도 해결되어야 하는 곳이어야 했다.
처음 찾아 간 곳은 마포의 한 설렁탕 집. 연탄 8개씩 넣어 밤새 뼈를 고아 내면 새벽 5시에 어김없이 일을 시작하기 위해 깨웠다. 처음 시작하는 일은 1층에 고은 탕을 2층까지 떠다 나르는 일이었다. 그냥 배 부르지 않아도 구수한 설렁탕 냄새만 맡으며 일해 행복했다. 국물 역시 마시면 천국이었다. 
17살에 시작한 5만원짜리 월급쟁이 생활은 서울에서 7만원으로 올랐다. 그러다 기술이 하나 생기고 이직하면 1~2만원씩 오르고, 그런 재미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다양한 요리를 익혀갔다.
충무로 냉면집에서는 다락방생활을 하기도 했고, 어떤 가게에는 바닥에 스티로폼 하나 깔고 이불을 3개씩 덮고 자기도 했다.
이같이 고생하며 이리저리 지낸 집만 무려 40군데가 넘었고 진주에서 ‘우이동불고기’의 성공신화를 쓰고 지난 2004년경 여기 김해로 넘어와 ‘하동한우국밥’으로 경남일대에서 서울/전주식 한우국밥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결식아동돕기 성금 지원
YMCA 국제와이즈맨 클럽 / 사랑의열매 지원
초록우산 지원

"음식값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손님이 정하는 것 - 11년 째 김해 한 곳에서 6천원 국밥으로 약속 지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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