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

  • 입력 2013.01.25 10:09
  • 수정 2016.02.21 00:20
  • 기자명 조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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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

 

 
 

박근혜|대통령 당선인

‘1,577만 3,128표’. 역대 대선 최다 득표였다. 동시에 51.6%의 사상 첫 과반 득표율도 기록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여성대통령은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탄생했다. 여기에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부녀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유례없는 진기록도 남기게 됐다.
‘원칙’과 ‘신뢰’의 리더십, 여성 특유의 세밀함과 부드러움으로 15년간 정치역정을 거친 박근혜 당선인. 그는 결국 두 번째의 대권 도전에 성공하며 앞으로 5년 간 ‘대한민국호’의 키를 잡은 ‘선장’의 타이틀을 달았다.

조성기 기자 maarra21@epeopletoday.com

 
 

 

새로운 ‘시대정신’ 실현해낼 리더로 우뚝 서다
불과 투표를 9시간 앞둔 지난해 12월 18일 밤, 마지막 유세지인 서울 광화문광장에 선 박 당선인의 마음은 비장했다. 그야말로 ‘초박빙’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선거 상황에서 그가 유권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준 것은, ‘국가와 국민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라는 진정성이었다.

“저는 돌봐야 할 가족도,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오로지 국민 여러분이 가족이고, 국민 행복만이 제가 정치를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박 당선인이 보인 진정성이 통했는지 투표를 한 유권자들의 51.6%가 그를 지지했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에 3.6% 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지난해 7월 10일,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지난해 7월 10일, 박 당선인은 젊음의 상징인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변화와 희망, 그리고 미래’를 화두로, 우리 경제와 정치, 사회의 변화를 통해 국민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밝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었다.
당시 국정 운영의 패러다임을 국민이 행복한 시대, 개인의 삶과 행복의 증대에 두고 따뜻한 국정 운영을 통해 대한민국을 바꾸겠다고 그는 역설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제시한 것은 바로 ‘경제민주화’였다.

양극화와 경기불황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 받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며 박 당선인은 “그간 우리 사회가 경제적 공정성의 중요성을 간과했고, 그 결과 경제주체 간 격차가 확대돼 불균형이 심화됐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일이 시대적 과제”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에 덧붙여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를 혼용한 ‘박근혜식 복지’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 국민 모두가 승리하는, 투명하고 신뢰가 넘치는 ‘미래’를 그려간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거의 여왕’

박 당선인에게는 조금 특별한 별명이 있다. 바로 ‘선거의 여왕’이 그 것. 야당시절, 그가 이끈 선거는 모두 승리해서 얻어진 별명이었다. 그러한 그의 능력이 가장 큰 빛을 발했던 것은 지난해 치러진 4.11총선이었다.

침몰해가는 ‘새누리호’를 이끌고 창당에 버금가는 쇄신작업을 단행, 총선 승리를 이끌어 낸 박근혜 당선인은 당내 타의추종을 불허한 대선주자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었다. 사실상 당시 새누리당으로서는 4.11총선에서 승리는 고사하고 100석을 채우기도 어려웠던 처지였다. 당시 총선을 앞두고 MB정부의 실정과 측근비리, 디도스 사건과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등 악재가 잇따라 터져 나와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던 것.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 이후로 비주류로 남아있던 박 당선인에게 한나라당은 곧장 ‘도움의 손길’을 부탁했고, 늘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을 때마다 당을 구했던 그는 다시 한 번 당을 살리기 위해 당시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해야만 했다. 

당을 추스르고 나아가 10.26 서울시장 재보선에 패해 열패감에 빠져있는 보수층을 어떻게 결집시켜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찾기’에 골몰했던 박 당선인은 먼저 당 쇄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과감히 당내 주류 인사들을 총선 공천에서 배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는 새누리당의 총선완승으로 나타났다. 선거의 승리로 박 당선인의 대권가도도 탄탄하게 열렸다. 4.11 총선은 그에게 구당(救黨)의 짐을 지웠지만 선거 승리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 

지난 2004년 대선자금 수사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로 인해 한나라당이 역풍을 맞으며 좌초 위기에 몰렸을 때도 당대표를 맡았던 박 당선인은, 꺼져가는 당의 등불을 되살렸었다. 더불어 당대표 임기 중 네 차례의 재보궐 선거에서 압승을 이끌어 냈다. 2년 3개월 간 제1야당을 탄탄하게 이끌며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당대표 임기를 100% 완수한 최초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대선 과정의 분열과 반목의 ‘통합’이 과제
1952년, 당시 군인신분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 딸로 출생한 박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육영수 여사가 유고한 이후에는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는 등 늘 평정심을 갖고 스스로의 균형을 지킬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쓰러진 뒤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청와대를 떠난 박근혜 당선인은 18년여를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았다.

박 당선인이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지난 1998년 4.2 재보궐 선거를 통해서였다. 이 선거에서 승리하며 제15대 국회에 발을 들인 박 당선인은 정치입문과 동시에 한나라당 부총재를 맡는 등 걸출한 ‘스타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2년 5월 12일에는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단독회담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서 남북문제에 대한 뚜렷한 소신과 통일에 대한 의지를 보여 준 사례기도 했다.
박 당선인이 최초로 대권에 도전했던 것은 지난 2007년 제17대 대선. 박근혜 당선인은 당시 한나라당의 당권과 대권의 분리 방침에 따라 2007년 대선을 1년 남긴 2006년 6월 16일,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에 돌입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서울시장을 지냈고 청계천 복원과 버스노선 개편 등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명박 현 대통령이었다. 본격적인 대선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박 당선인은 이명박 후보의 부패 비리 의혹을 집중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BBK 주가 조작 사건 등을 처음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 박 당선인은 이 후보에게 패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를 양보해야 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이 되면서 한나라당이 여당이 되지만 박 당선인은 ‘여당 내 야당’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 배제당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친박계 가신들을 아우르고 결집해 제18대 대선 경선을 승리로 장식한 후 대권마저 거머쥠으로써 박 당선인은 자신의 정치인생의 최고 정점에 이르게 됐다.

 
 

 

장기적인 불황과 양극화, 위기에 빠진 민생 등 서민들의 생활과 직결된 현안 문제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박근혜 당선인의 초반 집권기의 성패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따뜻한 성장’을 새 정부의 주요 기조로 밝히는 등 그가 공약한 경제와 복지 분야의 정책 드라이브를 힘차게 걸었다.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나라와 국민들을 돌보겠다는 박근혜 당선인. 모성적 부드러움과 꼼꼼함으로 앞으로 5년의 국정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국민들이 거는 기대는 크다. 역사에서 그가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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