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재상 비스마르크, 강력한 ‘독일’을 꿈꾸다

  • 입력 2012.12.24 13:21
  • 기자명 조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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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세계역사를 바꾼 20대 전쟁

지난 수천 년 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 대해 “도전과 응전”이라고 설명했듯 인류역사를 전쟁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더불어 그는 “전쟁은 모든 문명을 파괴시키는 주된 요인”이라고 역설하기도 해 전쟁의 해악성에 대해서도 꼬집은 바 있다.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수많은 전쟁들이 있어왔고 그 전쟁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왔다. 본 지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역사의 물길을 뒤바꾼 스무 차례의 큰 전쟁을 돌아보고 그 전쟁이 세계사 속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지를 20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註)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강력한 ‘독일’을 꿈꾸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보불전쟁(普佛戰爭)으로도 불리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목적으로 일으킨, 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이다. 표면상으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3세 황제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책동에 의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1871년 1월, 파리시 교외에 위치한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제국성립을 선포하고,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빌헬름 1세가 초대 독일 제국 황제로 추대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 외에 독일은 알자스 및 로렌 지방을 획득했으며 많은 전쟁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이 전쟁 후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도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프로이센의 거침없는 야욕
프로이센이 보오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긴 했지만, 남부 독일은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을 무력으로 병합하고자 했지만, 러시아와 영국은 이를 반대했다. 비스마르크는 단 4개의 연방만을 독일 영토로 편입시켰고, 프랑스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합병을 꾀하자 주 베를린 프랑스 대사인 베네딕트를 통해 프랑스의 이러한 행보를 문서로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그 동시에 런던 회의에서 룩셈부르크를 영세 중립 국가로 만들어 프랑스의 룩셈부르크 합병을 좌절시켰다. 당연히 프랑스는 이에 항의했고, 아직 전쟁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낀 비스마르크는 룩셈부르크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프랑스에 작은 외교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프랑스는 1867년 4월경 오스트리아에 동맹을 제의하나 오스트리아는 기본적으로 발칸에 관심이 있었고, 반대로 프랑스는 발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탈리아 역시 프랑스가 로마 교황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 반발했다. 결국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이후 스페인 국왕 선출을 둘러싼 양국 간의 분쟁이 격화되고 이에 독일의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로 프랑스를 지목했던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엠스 전보 사건을 조작했다.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술책에 휘말린 나폴레옹 3세는 5일 후인 1870년 7월 14일, 프로이센에 선전 포고를 한다. 사전에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때를 기다려왔던 프로이센과 별다른 준비없이 자신감만으로 무장한 프랑스와의 전쟁은, 개전 초부터 일방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프로이센 육군 참모총장 몰트케의 지휘 아래 프로이센은 북독일과 남독일의 지지까지 얻어 더욱 병력을 증강했고, 개전 4주 만에 바젠 원수가 지휘하던 프랑스군을 물리친 뒤, 프랑스 국내로까지 진격했다.
이후 독일군은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참가한 스당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마침내 9월 2일,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고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역사상 최초 시민 사회주의 정권 출현
하지만 이미 황제의 항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파리로의 진격을 개시했고 이에 격분한 프랑스 국민들은 독일군에 완강히 저항한다. 결국 9월 말에 스트라스부르가 함락되고, 10월 27일에 메츠가 함락되었으며 1871년 1월 28일에는 수도 파리마저 함락되면서 프랑스는 패배하게 된다.
보불전쟁의 결과, 2월 26일 ‘평화협정’이, 5월 10일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독일에게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할양하게 된다.
또, 파리 함락 직전인 1871년 1월 28일,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로 즉위,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해 독일은 강력한 유럽의 선두주자로 떠오른다.
비스마르크는 19년간 제국의 총리로 철권통치를 단행한다. 특히 이 기간 동안 독일은 프랑스를 대신해 대륙의 중심국가로서 외교상의 중심 국가가 된다.
당시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1878년 러시아?터키 분쟁의 조정을 베를린 회의를 통해 해결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회의는 대개 파리에서 개최되곤 했다.
비스마르크는 19년간 제국 수상직에 있으면서 독일 제2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프랑스의 복수를 염려, 재임 기간 중 복잡한 외교 관계를 형성해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데 모든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이룩한 외교 체계는 최소한 그 정도의 비중있는 인물이 관리하지 않으면 유지되기 힘든 체제였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는 전쟁 후 공화국을 선포했고, 나폴레옹 3세는 퇴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을 자신들의 영달의 기회로 삼은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와 노동자, 사회주의자, 파리 빈민들이 주축이 된 파리코뮌 간 내전이 발발했다.
파리코뮌은 근대 역사상 최초로 시민들에 의해 세워진 사회주의 정권으로, 정부군의 무차별 학살과 투옥으로 진압당하는 비운의 운명을 맞았다. 그렇다고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완전히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왕당파와 공화파, 사회주의자들 간의 갈등은 한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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