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국 발돋움의 기초

  • 입력 2012.11.29 15:57
  • 기자명 조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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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역사를 바꾼 20대 전쟁

지난 수천 년 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 대해 “도전과 응전”이라고 설명했듯 인류역사를 전쟁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더불어 그는 “전쟁은 모든 문명을 파괴시키는 주된 요인”이라고 역설하기도 해 전쟁의 해악성에 대해서도 꼬집은 바 있다.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수많은 전쟁들이 있어왔고 그 전쟁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왔다. 본 지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역사의 물길을 뒤바꾼 스무 차례의 큰 전쟁을 돌아보고 그 전쟁이 세계사 속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지를 20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註)

세계 최강국 발돋움의 기초
현대판 ‘로마’ 미국 독립전쟁


금세기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다. 177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지역은 본국의 가혹한 수탈과 지배로부터 13개 식민지주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전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8년간 지루하게 전개된 이 독립전쟁은 당초 식민지 문제에 관한 영국 내부의 내전 양상을 보였으나 1778년 프랑스가 식민지 측에 가담한 데 이어 1779년 스페인이, 1780년에는 네덜란드까지 가세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으로 변모했다.

수탈과 지배로부터의 ‘독립’

미국의 독립전쟁은 영국의 토머스 게이지 장군이 매사추세츠 콩코드에 있는 식민지군 탄약고를 파괴하기 위해 보스턴에 있던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전투가 일어난 뒤 식민지군은 보스턴에 포위공격을 개시했다. 이 포위는 식민지군의 헨리 녹스 장군이 타이칸더로가 요새에서 노획한 대포로 게이지 장군의 후임자인 윌리엄 하우 장군 휘하의 영국군을 공격해 영국군이 1776년 3월 17일 보스턴에서 철수하게 됨으로써 끝이 났다.
리처드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하는 식민지군은 1775년 가을 캐나다를 침공해 몬트리올을 장악한 뒤 퀘벡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 과정에서 몽고메리 장군이 사망했다. 식민지군은 퀘벡에 포위공격을 계속했지만 이듬해 봄에 영국군 증원 병력이 도착하자 포위를 풀고 타이칸더로가 요새로 퇴각했다.
영국 정부는 하우 장군의 동생인 리처드 하우 제독의 지휘 하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 뉴욕에서 하우 장군과 서로 합류하도록 했다. 영국 정부는 이들에게 식민지 측과 담판을 짓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식민지측이 항복할 경우 관용을 베풀 것이라는 점을 납득시키도록 했다.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포한 식민지인들이 영국 측의 평화제의를 거부하자 하우 장군은 롱아일랜드에 상륙해 8월 27일 식민지군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의 부대를 무찔렀다.
워싱턴의 부대가 맨해튼으로 후퇴하자 하우 장군은 북쪽으로 추격해 10월 28일 화이트플레인스 근처 채터턴에서 워싱턴에게 또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워싱턴이 맨해튼에 남겨두었던 수비대를 공략해 군인들을 생포하고 보급품을 빼앗았다.
리 요새에 있던 워싱턴의 또 다른 수비대를 공격한 콘월리스는 식민지군을 뉴저지를 지나 델라웨어 강 서쪽 연안까지 내몰았으며 겨울 동안 뉴저지의 전초기지에다 자신의 부대를 숙영시켰다. 그러나 그해 성탄절날 밤 워싱턴은 델라웨어를 가로질러 트렌턴에 주둔중인 콘월리스의 수비대를 공격해 1,000여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콘월리스가 곧 트렌턴을 다시 차지했으나 워싱턴의 부대는 트렌턴에서 빠져나와 프린스턴에서 영국군 증원부대를 무찔렀다. 워싱턴이 트렌턴과 프린스턴에서 거둔 전과는 식민지 측의 사기와 독립투쟁 열의를 북돋았다.

초강국 미국의 역사가 태동하다
1777년경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버고인 장군은 7월 5일 타이칸더로가 요새를 점령한 뒤 말을 더 구하기 위해 독일 용병부대를 버몬트의 베닝턴으로 보냈으나 독일 용병부대는 뉴잉글랜드의 식민지군에게 거의 전멸 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세인트 레저 중령의 영국군은 8월 6일 오리스캐니에서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이 이끄는 식민지군에게 격퇴되었다. 이렇듯 전세는 역전돼 식민지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프랑스는 1776년 이후로 은밀하게 식민지에 물자보급과 재정원조를 계속해오다 1778년 함대와 육군병력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해 6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북부지역의 전세는 대체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주로 남부지역에서 공헌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던 서배너에 대한 공략과 요크타운에 대한 결정적인 포위공격에 참가했다. 1780년 8월 16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캠던에서 콘월리스가 지휘하는 영국군은 게이츠 장군의 식민지군을 격파했으나 1월 17일 킹스마운틴에서, 그리고 1781년 1월 17일 카우펜스에서 식민지군으로부터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1781년 3월 15일 노스캐롤라이나의 길퍼드코트하우스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승리를 거둔 뒤 다른 영국군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 버지니아로 진입했으며 요크타운에 기지를 설치했다. 워싱턴의 군대와 프랑스의 로샹보 백작 휘하의 병력이 요크타운을 포위 공격했으며 콘월리스가 이끄는 7,000명의 영국군 병력은 1781년 10월 19일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됐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은 한 번도 승리를 위한 총괄적인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으며 또 군대 내부에서 협력과 이해가 부족했다. 한편 식민지군은 포지 계곡에서 폰 슈토이벤으로부터 훈련을 받을 때조차도 결코 타성적이 아니었으며 민병대는 대륙군과 함께 훌륭한 활약을 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1776년부터 1778년까지 프랑스의 보급물자와 자금 제공에 이어 1778년 이후 프랑스 육해군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식민지군은 영국군의 분열된 틈을 최대한 활용해 새러토가와 요크타운에서 영국군 전체를 패배시키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1783년 11월 13개 주의 독립을 얻으면서 초강국 미국의 역사는 시작될 수 있었다.

조성기 기자maarra21@epeople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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