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용가 정혁준, 한국무용춤사위로 세계를 누비다

  • 입력 2012.09.27 16:20
  • 기자명 박정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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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가 정혁준, 한국무용춤사위로 세계를 누비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무용을 벗으로 맞이한 춤꾼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는 인간의 수명이 길어봤자 100년 이쪽저쪽인데 반해 위대한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불멸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봄볕이 언 땅을 녹이듯이 예술은 메마른 인간의 마음에 윤기를 흐르게 하고, 각박한 삶에 여유와 부드러움을 안겨준다. 여기에 몸을 움직여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춤 예술을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춤은 궁중예악으로 정제되었고, 무속신앙에 자자들고, 탈춤이나 마당극으로 드러나 있다. 여기에 서양의 발레와 현대무용이 더해져 풍성한 확장성까지 갖추게 된다. 우리 무용계도 이런 역사만큼이나 역동적이고도 개성 있는 무용인들이 적잖게 배출되는 시기가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때 한국무용가 정혁준씨를 만나 그의 춤 인생의 향취를 맡아보자

아홉 살에 시작된 정혁준의 춤 길
정혁준은 9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동네 무용학원을 처음 찾았고, 무용학원 원장과의 첫 만남에서 소고춤을 추게 된다. 홀이 좁다는 듯이 뛰어다니며 열심히 춤을 추는 어린 혁준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넌 천생 춤꾼이구나!’하는 말로 혁준과 첫 대면을 하게 된다.
 TV를 보며 연예인들의 흉내를 곧잘 내는 막내아들을 어머니는 이미 1년 전부터 아동극단에 데리고 다녔고, 소고춤은 혁준이 거기서 익힌 춤이다. 동네 무용학원을 어머니와 함께 찾은 그 발걸음이 혁준으로 하여금 30년을 한 결 같이 춤인생으로 치닫게 한 시작점이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저 유명한 서정주의 ‘귀촉도’라는 시를 보면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라는 구절이 있다. 혁준처럼 춤에 죽고 춤에 사는 진정한 춤꾼에게 이처럼 딱 들어맞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한恨과 신명에 취해서 제 갈 길을 열심히 가는 예인들을 생각하면 이심전심의 감흥이 절로 밀려들지 않을 수 없다.
 
무용을 괜히 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요 “아무리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춤을 추면서 풀라”는 선배의 말이 늘 귀에서 맴돌았습니다. 선생님 말씀도 제 가슴에 들어있지요. ‘어깨 춤 하나라도 소질 없으면 아닌데 네가 추면 다르단다.’라는 말이요. 날마다 장구장단에 맞춰 춤집을 다듬다 보면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과 함께 마음이 정화되고 몸도 개운해집니다. 이튿날이면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에 힘이 솟고요. 또 “내 새끼 잘 한다!”는 어머니의 격려도 큰 힘이 됐습니다.
서울예술고등학교 나오셨지요 네 그래요. 돌이켜 보면 예고시절은 무용에 대해서 많이 알아가는 순수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지요. 연습하면 연습한 만큼 실력이 늘고 또 세상 걱정 없이 부모님 밑에서 학교만 다니면 되는 좋은 시절이었어요. 학교에 가면 저와 비슷한 길을 가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서 무용만 생각하면 됐잖아요.
 대학시절은 ‘나도 선배들처럼 유명한 콩쿠르에 도전을 해야지!’하는 목표의식으로 똘똘 뭉쳐 사는 재미가 쏠쏠했고요. 춤 주제가 정해지면 음악은 무엇을 쓸까 고민에 고민을 하면서 안무를 짜다가는 드디어 완성한 맛이라니! 그 작품을 가지고 나가서 청중과 심사위원들 앞에서 춤을 춘 결과가 큰 상으로 나타난 거예요. 그게 동아콩쿠르였지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고 신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립무용단 시절은 연습장에 나가고 공연하는 그 자체가 공무를 수행하는 일이었고요. 화려한 국제행사와 크고 작은 국내외 순회공연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며 눈 코 뜰 새 없이 오르내린 무대였기에 얼마나 활발했는데요. 그러니 생각해보세요. 공연예술가에게는 무대가 소원인데 저희들에게는 원 없이 무대가 마련돼 있었어요. 춤꾼으로서 이처럼 신나는 일이 또 어딨겠어요? 게다가 국위선양을 한다는 자긍심도 여간 아니었습니다.
학업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리해 주십시오 초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예술고를 거쳐 대학은 중앙대학 무용과를 그리고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했지요. 이후 성균관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하게 됐습니다.
무용께나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학력이 참 높아요 저의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박사과정까지 하게 됐어요. 첫째는 무용인생에 전환점을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학 땐 동아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은 일로 국립무용단에 수월하게 입단을 할 수 있었고, 무용단에서는 또 잘 나가다 보니 대학에서 강의 제의가 들어와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쯤 되면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되죠. 무용단에 남아있을 것인가 대학으로 갈 것인가.  이런 전환기에는 결단이 필요하잖아요. 대학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한 이상 박사과정으로 가게 된 것이고요.
학교에 출강하면서 이룬 것도 많으시지요 네 대학에 있다 보니 학사일정에 맞춰 강의를 소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기위주의 학과 특성 상 늘 연습이 뒤따르는 거죠. 학내외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찬조 출연하랴, 매년 학과 정기 발표라든지 졸업공연 등을 지도하다 보면 항상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가죠.
 여기다 제 개인 경력도 신경 써야 합니다. 교수로 진급하고 싶은 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자연히 굵직한 발표회를 기획하고.... 아무튼 석사 박사 과정도 사회나 학교에서 요구하는 경력의 한 부분이라서 하는 거고, 무용인생에 정체 왔을 때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거나 자신의 진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죠.
정혁준님의 스승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저의 큰 스승님은 최현, 이홍이, 임이조, 국수호, 권명화 선생님입니다. 우선 최현 선생님은 춤의 근원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춤의 원리나 미적 개념을 깨우쳐주셨지요. 구름이 하늘을 떠다니듯 꽃잎이 바람에 날리듯 자연스럽고 격조 높은 춤 세계의 맛을 알게 해주신 분이입니다.
 서울예고시절의 이홍이 선생님은 테크니컬하고 세련된 춤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고요. 이 홍이 선생님은 이런 점에서는 섣불리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월등한 감각을 타고 난 분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국수호 선생님은 남성다운 패기와 철저한 안무능력의 진면목을 알려준 분입니다. 연출력이 압권이라서 스케일이 크고 창조적인 발상이 넘치는 공연예술무대에 대해서 고민하는 자세도 배웠지요. 이분은 전형적인 무대연출가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임이조 선생님으로부터는 한량무를 권명화 선생님으로부터는 권명화류 살풀이춤을 배웠습니다.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이처럼 다양한 특징을 가진 스승과 선배들의 지도가 있었습니다.

개인 발표와 함께 다양하게 펼친 굵직한 활동
정혁준은 국립무용단을 나와서 홀로서기에 도전한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작품은 월드컵개막식을 위한 축하공연에서 조 안무를 맡게 된 일이다. 이후 대학 강사와 프리랜서 무용수로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갔다.
 월간 ‘춤과 사람’에서 주최하는 젊은 안무가 전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고, 2010년도에는 서울무용제 자유참가작에 선발되어 참여하게 된다.
 개인발표회도 두 차례나 열었다. 2002년에 ‘청서듦’이라는 작품으로 2003년에는 국고 지원을 받아 ‘교활낭패’라는 작품으로 각각 창작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개인발표회는 춤만 추던 무용수에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총감독의 역할과 안무자로서 발돋움을 하는 관문이나 마찬가지다.
 그동안처럼 무용수로서 맡은 역할만 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작품 안무는 물론 무용수 섭외와 무대장치, 음악 문제, 의상제작비, 분장, 인쇄비, 조명과 스텝 진들의 출연료 마련 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책임이 뒤따른다. 여기다 극장 대여료까지 합치면 만만찮은 경비 문제를 해결하는 몫도 개인발표회를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다. 안무가 혹은 연출가는 이처럼  무용수로서 출연만 하는 무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정혁준의 최근 활동과 계획
 지난 7월엔 부산시와 쓰시마 간의 조선통신사 기념 아리랑축제에도 참여했고, 블라디보스톡 창도행사에 무용단을 인솔하고 다녀왔다. 정혁준은 이처럼 늘 크고 작은 공연을 소화하느라 바쁘다. 교육가로서 무용교육의 효과에 대한 연구에도 부지런하다. 춤은 인간의 심성을 다스리는 최고의 행위예술이라는 신념에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혁준의 최대 강점은 9살 때부터 익힌 한국전통무용에 대한 탄탄한 실력이다. 문제는 무용계가 너무 전통춤과 창작춤으로 이분화 된 점이다. 최승희로 대변되는 신무용도 우리 무용계의 큰 자산이므로 전통춤과 창작무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 계승하고 심화 발전시켜 한국무용이 세계의 공연예술계에서 거역할 수 없는 트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안무가와 감독으로서 이바지 하는 것이 정혁준의 꿈이다. 

춤 인생 30년, 정혁준은 여전히 한국무용으로 진화 발전하며 포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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