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약을 위해 날갯짓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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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약을 위해 날갯짓하다
  
금속공예가 김승희 국민대 교수

“우리나라는 ‘금속공예’의 나라입니다!” 작은 자연이라는 뜻을 가진 다목적 공간 안에 있는 김승희 국민대 교수의 개인 작업실인 ‘소연(小然)’에서는 특별한 강의가 한창이었다.
김승희 교수가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강의를 이어나가는 모습은 죽이 척척 맞는 놀이마당 같은 분위기였다. 전문인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이런 ‘금속공예’ 강의에 40~50대 여성들이 모여와 귀를 쫑긋 열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경쾌하고도 세련된 금속성 합창이 팍팍 튀는 것 같은 분위기다.

박정례 기자 jrpark@epeopletoday.com

 


김승희의 학업과 사랑

김승희 교수는 숙명여중고를 거쳐 서울대 미술대를 졸업했다. 이 시절 디자인에 대해 통사적으로 배우기는 했지만 금속공예를 제대로 접할 수 있는 별도의 수업은 개설돼 있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미술계는 평면작업에만 매몰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명동거리를 거닐다가 헌 책방에 들르게 되었다. 여기서 공예전문지 ‘Craft Horizen’를 발견하고 금속으로 만든 작품 사진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이를 본 김 교수는 자신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은 열망을 품게 되고 유학을 목표로 매진했다. 그 결과 크랜브룩 미술대학원(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장학증서와 입학허가서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유학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짧은 영어실력과 부족한 전공지식에서 오는 자신감 결여까지 겹쳐 모든 게 낯설고 힘든 것투성이였다. 그러던 중 크랜브룩에 초빙교수로 와 있는 아이커만 교수의 특강을 들으면서 그는 그제야 전공분야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활로를 찾아 I.U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다.
이때부터 김 교수는 전형적인 미국의 대학생활을 제대로 만끽하면서 금속공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게 된 것도 이곳이었다. 당시 아이커만 교수에게 배운 대학원생 15명 중 12~13명이나 대학교수가 됐을 정도로 I.U 대학원시절은 김 교수에게 실력과 자신감을 갖추게 해준 소중한 기간이었다.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과 교수생활

4년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첫 관심사는 우리나라의 전통 금속공예 연구였다. 미국에서 “한국의 금속공예는 어때?”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대로 된 답변 하나 못하고 얼굴만 붉혔던 뼈아픈 기억은 김 교수로 하여금 한국 금속공예의 역사적 배경과 특징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했다.
한편 미국에서 돌아온 이듬해 그는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현 롯데백화점 본점(구 미도파백화점)에서였는데 반상기, 구절판, 은수저, 촛대 등 우리나라 전통 식기를 디자인하고 출품해 호평을 얻었고 작품 주문도 쏟아졌다. 이처럼 그의 첫 개인전은 대성공이었다.
김승희 교수는 36년 6개월째 국민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가 국민대에서 이뤄놓은 사업은 적지 않다. ‘금속공예과’를 개설했고, 테크노디자인대학원과 쥬얼리디자인센터(J.D.C)를 열어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미술계에서는 ‘금속공예과’에 관한한 국민대 금속공예과가 우수하다는 평을 하곤 한다. 그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학생들이 다 자식 같았다며, 늘 칭찬과 격려를 해준다며 밝게 웃음을 지었다.
괴테는 일찍이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 교수의 부드러운 여성적 카리스마가 그런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실한 열매를 맺게 한 듯 보인다.

‘정년’을 맞은 그의 새로운 도약

요즘 일부 대학에서는 학과를 폐지하거나 통폐합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경제논리에서다.
금속공예과의 예를 보자. 인사동에 쌈지길이라는 건물이 처음 생겼을 때 국민대, 서울대, 이대, 배제대 등 6개 대학의 공예 관련학과가 입점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대의 ‘소연’을 빼놓고는 다 철수한 상태다.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한국의 명품공예품을 찾는 필수코스로 육성한다는 미명하에 개장한 ‘쌈지길’이었다.
그러나 매출로 연결되지 않는 통에 ‘소연’도 양자택일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때마침 방학을 맞은 김승희 교수는 10만원 안팎의 탄생화 장신구를 만들기로 매출부진을 탈출하기로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공예가들은 자신이 만든 명품을 누군가 소장해주기를 바란다. 공예가의 성공은 작품을 구매해주는 고객이 있을 때 존재가 빛나는 것이니까.
그는 지금까지 배움과 진로 탐색기를 거쳐 전공분야를 확정하고 학업의 발전을 위해 유학시절을 보냈고 귀국해 교수로서, 그리고 금속공예가로서 한국의 금속공예발전에 온 힘을 써왔다. 그런 그가 또 다른 도약을 꿈꾸고 있다. 김 교수 개인의 역량을 집약해 사회교육원과 갤러리를 운영하는 새로운 창조프로젝트를 가동하려는 것.
일반인들을 상대로 개설한 ‘금속공예’ 강좌를 9월에 개강할 예정이다. 이때부터는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는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차고 나온 쥬얼리처럼 멋지고 환상적인 장신구를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창조성 넘치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김 교수는 또 종로 귀금속단지와 연계해 쥬얼리산업의 발전에도 베이스캠프역할을 하는 밑거름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김 교수를 볼 때 경력단절 없는 영원한 현역의 모습을 본다. 그런 면에서 기술은 참 좋다. 예술은 멋지다. 얼마든지 새로운 도약을 위해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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