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등불’되고자 교육가로서 일평생 바쳐온 元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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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등불’되고자 교육가로서 일평생 바쳐온 元老

안채란 박사
학교법인 영석학원 설립자

‘有志者事竟成’이란 말이 있지만, 대게 뜻만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일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공(功)이란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실천으로 행할 때 거둬지는 법. 학교법인 영석학원 설립자 안채란 박사는 전 생애에 거쳐 굳은 의지와 노력의 소유자로, 끊임없는 집념과 열정으로 영석학원을 발전시켜 큰 성과를 거둔 立志傳中의 사람이라 하겠다.
안 박사는 애교심 강한 인사로, 그의 모교인 동국대학교 이사이자 총동문회 부회장으로 모교에 여성장학회를 설립해 장학기금을 희사(喜捨)해왔다. 또한 미수(米壽)를 맞이해 감정가 1,000억 원에 달하는 영석학원을 동국대학교에 기증함으로써 ‘학교세습의 고리’를 끊어 새롭게 시민사회의 가치를 열어낸 위대한 여장부이기도 하다. 필자는 ‘세상을 비추는 교육’을 몸소 실천해온 안채란 박사의 일생을 통해 이 사회에 귀감을 전하고자 지금부터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조명해보기로 한다.

글/신국주 전 동국대학교 총장
동행취재/이민정 기자 meua88@epeopletoday.com

일제 내선일체(內鮮一體) 압박, 고학의 어려움
극복하며 불굴의 꿈 키우다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안채란 박사는 의정부 낙양동(현재 녹양동)에서 출생했다. 안 박사의 부친인 안영석 한의학자는 竹山安氏 4대독자인 한편 평소 안 박사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도, 가난하게 하는 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되찾고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전해왔다. 애국을 실천하고자 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으며 어릴 적부터 안 박사는 학교설립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어려움 없이 보내온 시절도 잠시, 일제가 내선일체를 주장해 조선인을 압박하자 가세는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언어, 문화, 경제 등 모든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우리 민족은 사는 게 사는 것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세 때 양친을 여읜 무남독녀 안 박사는 넉넉지 못한 여건 속에서 자립의 생활환경을 개척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그는 부친이 남긴 뜻을 잇고자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며 자신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굳혀나갔다.
안 박사가 스물이 되던 해에 우리나라는 드디어 일본의 속국에서 해방 됐다. 그는 당시 한국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화신백화점의 점원으로 근무하면서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여성으로서는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당시에 고학을 하며 다닌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안 박사는 6.25전쟁이 중단된 1954년에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이어 동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과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 행정학 및 교육학 석사학위를 거쳐 경기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교육자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나갔다.
학교설립에 필요한 자본금을 모이고자 한 푼 두 푼 저축해나가며 그 꿈에 다가섰지만 안 박사가 이를 실현하기까지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손톱이 닳도록 일을 가리지 않고 더욱 열심히 했다. 안 박사는 당시 50~60년대를 돌이키며 “삶에 있어 새로운 꿈을 실현하기 위한 인고의 세월”이었다고 전했다. 


굳은 의지로 버텨온 세월, 오랜 꿈 ‘영석학원’ 설립하다

학교 부지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녀온 안채란 박사는 수락산과 도봉산 사이 정남향을 하고 있는 현재의 영석학원의 부지를 보고나니 ‘여기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의정부에 부지를 마련한 날을 떠올리며 그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고백했다. 이어 “학교설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견뎠는지 주마등처럼 스치며 앞으로 국민교육에 이바지하고 인재양성에 힘쓰는, 북경기 지역 최고의 사학으로 만들고 싶다”고 다짐했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1960년대, 나라경제가 어려워 공립학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에 사립학교 건립은 교육계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때문에 안 박사도 당연히 학교설립 허가까지는 무사히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교사(校舍)를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의정부시내에 벽돌공장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유통을 하기에는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자신의 꿈을 미룰 수도 없었기에 안 박사는 팔을 걷어붙여 건설현장 노무자들과 함께 공사에 필요한 벽돌을 직접 찍어냈다. 피곤이 온 몸을 짓눌렀지만 안 박사 가슴 한 구석에 있는 희망이 힘이 돼주었다. 그는 사택에 심어져있던 좋은 수목들을 학교에 옮겨 심으며 장차 이 학교에서 자라날 인재들을 상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1969년 늦가을에 드디어 교사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육영사업을 향한 의지를 키워가는 안 박사에게 어려움이 찾아 왔다. 교육청으로부터 신입생 배정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것. 교육청 관계자들을 만나 거듭 설득한 끝에 의정부 관내에서 성적이 우수하지만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학생들을 추천받아 무료로 교육시키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안 박사는 마침내 1970년 3월 입학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러나 영석학원이 설립된 1970년대 초 우리나라 사회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다. 개교 후 며칠이 지났음에도 어려운 형편에 교복을 사 입지 못한 학생들이 눈에 밟혔던 안 박사는 그 학생들의 인원수를 파악해 교복을 사 입히는 등 물심양면으로 학생들을 보듬었다. 그의 열성 덕분이었는지 정상적으로 성장해 나가던 영석학원은 1973년에 중학교, 이어 1974년에 고등학교가 첫 입학생을 뽑았고, 경기도 수학과 연구수업 평가에서 모범학교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소유 실천, 영석의 발전을 위한 선택

사학을 운영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교사(校舍)를 보수하거나 증축할 때에는 이사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도 막중했다. 그러나 안채란 박사는 이 모든 과정들을 건학이념 실현의 과정으로 이해바라고 기꺼이 개인적 손해까지 감수하며 응했다. 하지만 교육행정의 과도한 간섭은 안 박사가 지키려하는 건학이념을 훼손할 때도 있었고, 그때마다 그는 타협하지 않고 강하게 맞서왔다. 물론 손해를 보기도 했고, 영석학원의 일부인 중학교를 폐교해야했던 엄청난 시련도 찾아왔었다. 스스로 설립한 학교를 제 손으로 폐교할 적에는 자식을 땅에 묻는 듯 했다던 안 박사. 하지만 그는 “교육자로서 정도(正道)를 걸어왔다”고 생각하며, 40여 년 교육 사업을 해오는 동안 “학교는 사업의 대상이 아닌 사회와 국가에 대한 헌신”이라고 의지를 굳혀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안 박사는 설립자로서 추구하는 목표가 뚜렷해 여러 이들과 부딪치다보니 어느새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 갈 인물이 필요할 때가 도래했음을 느끼며, 영석학원의 역사 위에 더 발전 된 역사를 써내려가기 위해 새 인물을 찾아야 했고 이를 꼭 혈육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안 박사는 열린 사고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추구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영석학원을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에 “설립자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교육에 종사했던 교육자 중 한사람으로서 양심으로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었다”고 전하며, 일평생 자신이 일궈온 영석학원을 모교인 동국대학교에 무상기증(합병)하기로 결심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안 박사는 지난 2009년 영석고등학교를 포함해 자신이 소유하던 부동산 등 감정가 1,000억 원대의 재산을 자신이 10년 동안 다녔던 모교 동국대학교에 기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안 박사에게 자식과 같은 영석학원을 흔쾌히 전달하기로 한 것은 모교에 대한 그의 애정 때문일 것이다. 이어 그는 10년 “영석학원이 북경기 지역 최고의 명문사학으로 거듭나도록 모교 동국대학교 재단에서 힘써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영석학원의 제자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국가와 사회를 위한 역군(役軍)으로 일익을 담당하고, 모교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갖기 바란다”는 바람을 전했다.
비록 영석고교는 안 박사의 품에서 떠났지만 “영석이란 교명은 일제 혼란 속에서 나라를 되찾는 길은 교육이라 훈학하셨던 부친의 아호인 영석(榮錫)에서 따온 것이므로 지켜졌으면 한다”던 그의 뜻을 존중해 교명을 이어가는 한편,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 영석고등학교’로 제2의 개교 후 새롭게 도약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한 안채란 박사. 그는 자신이 설립한 사단법인 채란불교사상연구회를 통해 젊은 청년들의 지적 개선과 사회복지 실현에 미력하게나마 기여하고자 한다. 아울러 안 박사는 1986년 설립한 영석장학회, 1994년 설립한 채란장학회를 통해 후학을 돕는데 여생의 남은 힘을 다하겠다는 뜻을 다지며 “바라기는 나의 삶을 진심어린 애국심 발로로 헤아려 달라”는 바람을 전했다. 

안채란 박사

학력
1954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문학사)
1973 동 대학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 석사)
1982 동 대학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86 미국 골든스테이트대학교 명예철학박사
1999 경기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54호

경력
1949 동국대학교 여학사회장(40년)
1970 복지중학교 설립 개교
1974 복지고등학교 설립 개교
1975 의정부 교도소 선도교육위원 위촉
      한국사학법인연합회 중앙회 발기 이사 겸 경기지부 부회장
1979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가사조정위원
1986 새마을합기도 경기도 연합회장
     재단법인 영성장학회 설립
1988 복지에서 영석중·고등학교로 계명 승인
1993 동국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12년)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6년)
1994 재단법인 채란장학회 설립
1999 민족증흥회 운영위원
2002 영석고등학교장 재취임
2004 영석고등학교장 사임
2005 사단법인 채란불교사상연구회 설립
2006 학교법인 영석학원 이사장 취임
2011 학교법인 영석학원과 동국대학교 무상 기부합병
2011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 취임

표창
1971 경기도 교육위원회 교육감 표창
1975 의정부시 교육장 표창
1982 국무총리 표창
1995 의정부시장 표창
1998 제15대 대총령당선에 대한 감사패
1999 사학육성공로장증 봉황상(한국사립중·고등학교법인협의회)
2007 제4회 장한 한국인상(뉴스웨이)
2011 동국대학교 명예교육학 박사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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