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한국 언더그라운드 뮤직의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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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그라운드’ - 방송에 출연하는 뮤지션들을 통칭하는 말

'언더그라운드‘ - 방송에 나가지 않고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뮤지션, 혹은 주류 음악계를 탈피하고자 하는 뮤지션들을 통칭하는 말.
Keyword - 저항(Resistance), 독립(Independence), 비주류(the Nonmainstream)
 
 
정환용 기자 maddenflower@gmail.com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
 

 

 

분야를 막론하고 주류와 비주류는 항상 나뉘어져 왔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는 그 정도가 심하다. 스타급 배우들이 총출동하고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입되는 일명 ‘블럭버스터’ 영화가 전국 극장의 70%를 점령하는 와중에 소박한 규모의 독립영화는 극장 상영조차 제대로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미 상업주의로 길들여진 대중의 감각은 소박하고 독특한 색깔보다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에 더 뜨겁게 반응하게 됐다. 자연히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온 아티스트들은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비주류에 대한 따뜻하지 못한 시선은 음악사(史)에서도 존재해 왔다. 거대 자본에 의해 음악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주류 음악계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은 주류 시장의 그늘에 인디 신(Scene)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주류 음악계가 지상의 세력이라면 비주류 음악인들의 활동 공간은 지하(Underground)의 무대였다. ‘독립’을 뜻하는 ‘Independent'를 줄여 부르는 인디음악과 음악인들은 ’지하‘에서 ’독립‘으로의 발전을 표방하며 현재까지 주류와 차별화되는 그들만의 리그(League)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태동(胎動) - Early 1980s
 
뮤지션과 자본은 실과 바늘과 같다. 자신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싶어하는 음악인들은 무한한 스펙트럼을 내재하고 있지만, 자본을 가진 투자자들은 대중과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최초로 ‘인디’라는 단어가 음악계에 등장한 것은 저항 정신으로 무장한 펑크(Punk) 록이 활개를 치던 1970년대 중반이다. 당시의 음반 제작사인 애틀랜틱 레코드, EMI 등은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와 같은 당대 최고의 록 스타들을 ‘모셔야’ 했기 때문에 신인 발굴에 인색했다. 이것은 후일 주류에 대한 펑크의 무차별 폭격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구성된 인디 레이블을 통해 펑크록의 아이콘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클래시(Clash) 등 걸출한 뮤지션들이 대표적인 인디 밴드로 자리 잡았다.
 
국내의 뮤지션들이 오버그라운드에서 눈을 돌리게 된 시기 역시 80년대 초반부터다. 민중가요와 CCM 등의 장르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처음부터 대중과의 소통이나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왕(歌王)의 칭호를 얻은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이선희 등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가수들이 대거 등장한 1980년대의 한국 가요계는 위험할 정도로 가파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장르의 폭이 줄어드는 대신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가수들이 나타나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됐다. 같은 시기에 눈을 뜬 시나위, 송골매 등의 록밴드 역시 방송의 이면(異面)에서 나름의 활동을 시작하며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는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은 TV, 라디오 등 방송매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이 더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 현재의 음악계처럼 음악보다 자본이 앞서는 것을 걱정하던 뮤지션들의 음악은 공연장을 직접 찾아 듣지 않으면 듣기 쉽지 않았고, 자연히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일종의 매니아(Mania) 층을 형성해 가며 작지만 탄탄한 그룹을 만들어갔다. 도태(淘汰)가 아닌 독립(獨立)이었다.

 

 

 

 

 
 

 

 

 

 

 

 

들국화, 음악사의 새 장(場)을 열다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들국화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들국화 이전의 음악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을 찾았다면 들국화 이후에는 뮤지션이 원하는 것을 대중이 받아들이게 됐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과, 뮤지션의 음악을 좋아하는 대중은 같은 출발점에 서 있다. 다만 후자의 경우 음악적 독창성과 성장에서 더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인권과 이주원, 최성원이 모여 3인 체제로 비공식 활동을 시작한 들국화는 1983년 11월 팀명 ‘들국화’로 첫 공연을 시작했다. 기타리스트 조덕환의 합류로 4인 체제를 구축한 그들은 1985년 9월에 그들의 1집 ‘들국화’를 발매하게 되고 이 앨범은 가히 ‘대중음악의 시작’이라 불릴 정도로 그 의미가 크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뮤지션들에게 들국화의 등장은 일종의 기폭제가 됐고, 발매 시기가 작곡부터 녹음까지 모든 음반 작업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던 분기점이었기 때문에 음악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등 현재까지도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재창조되고 다시 불리는 곡들이 수록된 이 앨범은 한 언론매체에서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들국화의 앨범을 오버와 언더의 한 측면에 두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그 경계는 누군가가 문서화한 공식도 아닐뿐더러 뮤지션과 대중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굳이 주류와 비주류에 경계선을 긋는 것은, 양쪽 모두가 음악사에 존재하지만 그 질과 양에 관계없이 주류 쪽에 지나치게 치우쳐진 시스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민중가요의 첫 번째 창작집단으로 볼 수 있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악을 당시 방송에서 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플레이어와 리스너가 필요충분조건인 음악계에 거대자본이나 흥행 등 다른 요소가 포함된 것은 한번쯤 깊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 록밴드의 필수품 전자기타는 '일렉트릭 기타'로 불리며 다양한 형태로 수많은 제품들이 있다

사진은 Gibson 社의 Les Paul Standard Gold-top

(사진 제공 : 스쿨뮤직 www.schoolmus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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