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조명되는 ”메니페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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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성인과 청소년 1,7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86%가 정치·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열명 중 아홉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정치인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불신이다. 정치인들이 당선을 위해 내세우는 공약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정권 불신을 가속화하고 있다. 올바른 공약을 내걸고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 미화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돼야 한다. 참공약 선거를 위한 시민운동 ‘메니페스토’가 주목받고 있는 현재 정치인의 공약과 실천에 주목해 보자.

정환용 기자 maddenflower@gmail.com


▲ 매니페스토를 그림으로 설명한 일러스트. 매니페스토 운동의 지침과 유의사항을 장난감 큐브의 형상을 통해 설명한다.

참공약 민주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

‘메니페스토’(Menifesto)는 1834년 로버트 필(Robert Peel) 영국 보수당 당수가 처음으로 도입한 시민운동이다. 이것은 선거에서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따져보고 당선 후 공약을 지키도록 한다는 취지의 ‘참공약’ 운동을 뜻하는 말이다. 필 당수는 발표 당시 “겉만 번지르르한 공약은 잠깐의 환심을 사겠지만 결국은 실패할 것”이라며 정치인들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공약을 제시할 것을 강조했다. 이후 1997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메니페스토를 제시해 집권에 성공하며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국내에서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정책선거’라는 단어로 처음 사용됐다. 최근 참여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증폭하며 현재의 정권에 반발하는 시민들이 내세우는 정치인의 기본 소양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재까지 매니페스토의 평가지표에 사용되는 것은 스마트(Smart), 셀프(Self), 파인(Fine) 3가지다. 스마트 지수는 매니페스토의 발상지 영국에서 개발한 지표로 공약의 구체성(Specific), 측정 가능성(Measurable), 달성 가능성(Achievable), 적절성(Relevant), 시간적 가능성(Timed) 등을 근거로 0~5점의 점수를 매기는 분야별 공약 평가에 사용된다. 셀프 지수는 정책의 종합 평가를 위한 지표로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 자치역량 강화(Empowerment), 지역성 반영(Locality), 이행 가능성(Follow up) 등의 4가지 항목에 1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부여한다. 가장 최근에 등장한 파인 지수는 한국의회발전연구회의 지표로 공약의 실현 가능성(Feasibility), 유권자의 반응(Interactiveness), 효율성(Efficiency)을 기준으로 한다. 이 지표는 정치선거 뿐 아니라 생활문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공적인 공약을 제시하는 사회 전반에 걸쳐 평가될 수 있는 객관적 수치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 매니페스토 운동이 발효된 것은 2006년 5월 지방선거부터였다.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는 것 뿐 아니라 비틀린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한 정치운동이 시작되며 상대를 비하하는 전략(Negative)이 아니라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전략(Positive)을 지향하기 위함이다. 한국에 처음 매니페스토 운동을 들여온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대표 강지원)는 주요 정당과 후보자들에게 좋은 정책 개발과 공약 이행의 실행을 권고하고 전국 순회 아카데미를 진행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 왔다. 이 운동은 제도적 측면에서도 일부 성과를 이뤘는데, 선거법의 개정이 없이 도덕적 주장만으로는 매니페스토 선거를 활성화하기 어렵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노력으로 2007년 1월과 2008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공직 선거법이 개정되며 정치인과 후보자들의 매니페스토 운동이 조금씩 활성화되고 있다. 국내에 매니페스토 운동이 정착하고 정치인과 국민들이 이 운동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발전적 정치가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정치간 소통의 문제

최근 정치에 대한 20~30대 청년층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일방적인 정보공개 형태에서 인터넷, 소셜네트워크(SNS) 등 양방향 소통이 원활해지며 PC 사용이 능숙한 젊은 세대가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불어 실시간 정보제공의 양과 질은 나날이 상승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으로 전락했다. 아직까지 국가적 규모의 정책이 날치기로 통과되는 만행이 자행되고는 있으나, 그에 대한 시민의 반발과 저항은 예전에 비해 ‘정보’의 힘을 등에 업고 강력한 의사표현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 11월 22일 한·미 FTA 협정에 대한 비준안이 국회가 폐쇄된 채 돌발성 날치기로 통과되자 시민들이 광화문, 여의도 등지에 모여 강력하게 반발하는 등 여당의 국민소통 거부행위에 반기를 들고 있다. 이는 단순히 여당인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이 FTA 협정을 강행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통을 원하는 국민의 의지에 반응하지 않는 여당의 강압적 정책 이행에 대한 반발도 일부 작용하고 있다.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정치인이 해당 공약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문제 ‘약속 지키기’

스스로 공언한 국민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정치인이 외치는 ‘믿어달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은 없다. 이는 현재까지의 정치에 실망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안이다. ‘약속’은 단순하지만 중요하다. ‘당선이 되면 xx를 하겠다’고 공언해 당선된 의원이 ‘xx를 이행하기에 어려운 실정이다’고 말을 바꾼다면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고 그의 말을 믿고 표를 준 시민들을 우롱한 것이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강지원 대표는 “누가 표를 얻기 위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확인하는 유권자운동이 절실하다”고 했다. 정치인의 거짓말을 판단하는 행동은 그들에게 투표하는 국민들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매니페스토를 실천하지 못한 정치인에는 현직 대통령도 포함된다. 이 대통령이 2007 대선 당시 내세웠던 110여 가지의 공약 중 임기 4년째인 2011년 11월 현재 정상 이행된 내용이 절반이 채 못 된다. 일부 공약은 당선 후 내용이 바뀌었고 국민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강행중인 공약, 그리고 실패로 판단되는 공약들도 다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이 대통령의 매니페스토는 실패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실정이다.(자료 1) 국가의 수장이 내세운 공약조차 임기 내에 지켜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매니페스토 운동, 그리고 정치인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자발적 의무이행, 그러나 법적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1947년 미국 하원에서 선거에 승리한 정당이 메니페스토의 이행 의무에 대한 법적인 구속력은 부정됐다. 정치적인 구속력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한 법적 조치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선거 후보자가 내세우는 공약은 정치인이 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로 인정된다는 것인가? 이것은 후보자의 공약을 믿고 그에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시민의 주권이 무시당한 처사라고 볼 수 있다. 매니페스토의 법적 구속력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단지 당선되어 정치인이 될 목적으로 달콤한 거짓말로 유권자를 유혹하는 기만행위가 정당성이 부여되는 선거운동이 되어버릴 수 있는 위험한 결과다.

매니페스토의 법적 구속력은 비단 해외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당선 후 이행되지 않는 공약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현재까지의 선거운동에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자세에 변화를 가져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인천과 안산, 수원을 연결하는 수인선이 지난 8월 착공돼 한창 공사 중이다. 지난 1995년 폐쇄된 협궤열차 길을 복원해 인천과 수원을 연결하겠다는 이 제안은 10년이 넘게 서류로만 존재했다. 시장과 의원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진척이 없었던 수인선 계획이 이제야 공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이전의 정치가 공약 이행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됐고 그에 대한 시민들의 쓴소리에도 답을 내놓지 못한 정치인의 의식 문제 때문이다.

 

▲ 2010년 매니페스토약속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영배 성북구청장(왼쪽)과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강지원 상임대표

정치인 스스로 자각해야 발전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을 되돌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모든 정치인이 깨달아야 한다. 현 정권이 손가락질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소통’보다 ‘책임감’에 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에서 느끼는 책임감의 본질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뽑아 준 국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약속을 내걸고 책임감으로 공약을 실천하는 정치인이 박수를 받기보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아직 그렇지 못한 현실을 우리는 대면하고 있다. 총선과 대선이 머지 않은 이 시점에서 국민들과 예비 정치인들이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은 허황된 계획이 아니라 약속의 실천 가능성이다. 국민의 지지가 없이는 정치인도 존재할 수 없듯, 정치인 역시 국민의 니즈(Needs)에 부합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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