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1930년 1월 24일 - 청산리전투의 백야 김좌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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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장군
김좌진장군

1930년 1월 24일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이 생을 마감했다.
김좌진(金佐鎭, 1889년 12월 16일~ 1930년 1월 24일)은 한국의 아나키스트, 사상가,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군인, 시인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는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좌진 장군은 1930년1월 24일 주중청년협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한족총연합회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했다.

김좌진 장군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위인이다. 김좌진 장군은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 조달의 목적으로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으며 복역 중 김구와 조우한다. 이 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로 망명했다.
김좌진 장군은 대한정의단에 합류해 군사부문 책임자가 됐고 동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됐다.
1918년 김좌진장군은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했으며 다음해에는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그는 5년 후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해 일본군을 대파했으며 이듬해에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김좌진 장군은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만주로 돌아와 192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했으며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며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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