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투데이 김은서 기자]= 작년 2014년은 '세월호 참사'와 '판교 환풍구',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 사고' 등 유독 대형 사건사고가 많은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그 중 윤 일병 집단폭행 및 가혹행위 사망사건은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키는 동시에 병영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게 만들었다.
잔인한 군대 문화 뿐 아니라 국민들을 노하게 한 것은 '윤 일병이 음식물을 먹다 한 대 맞고 기도가 막혀 숨졌다'는 군의 발표였다.
이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하고 숨졌다는 과거 전두환 정권 당시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떠오른다"며 불의에 대한 조작·은폐 시도를 비판했다.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 전국민의 숨소리까지 검열하는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제5공화국 말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민주운동가 박종철 열사는 군사독재정권의 불의에 맞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공안당국에 붙잡혀 갖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반복해서 받았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외쳤던 그는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23살의 꽃다운 청년의 목숨이 폭력 아래 사라졌지만, 경찰은 '쇼크사'였을 뿐 고문은 없었다면서 고문 사실을 은폐했다.
이에 경찰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자체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그 결과를 묵인했고 검찰 역시 별도의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이후 경찰은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고문에 가담한 경관은 2명 뿐이라고 발표하고 이들을 검찰에 송치해 비난을 잠재우고자 했다.
그러나 5월 18일 광주민중행쟁 희생자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열사 고문에 가담한 자는 애초 알려진 것과 다르게 2명이 아닌 5명'이라는 사실과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이 지급되었다'는 것이 추가로 밝혀져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결국 이러한 경찰의 사건 조작과 검찰의 은폐는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민주화의 발판으로 작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