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씨앗을 뿌리는 문화 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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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투데이 김선훈 기자] = 세상에는 인지도가 낮고 소규모이지만 가치 있는 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특히 선진국의 경우 ‘작은 박물관’들이 수 없이 존재하는데 작은 것 하나라도 가치 있는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너무나 훌륭하고 볼거리가 가득한 사립박물관들이 지방 곳곳에 숨어있다.

백제 유일의 사찰인 수덕사가 숨 쉬고 있는 충남 예산은 우리 민족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는 곳이다. 예산군 안에서도 한우로 유명한 광시면에는 이재인 관장이 운영하는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위인들의 문화재급 인장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의 이재인 관장은 한 인간의 삶의 끝과 함께 한 줌의 재로 변하는 수많은 인장들의 가치를 보존하며 문화선진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문학청년 이재인, 인장의 매력에 빠지다. 

이재인 관장이 인장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문학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16세 때의 일이다. 그는 문학에 빠지다 못해 책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문학청년이었다. “서울에 있는 헌 책방에서 김소월의 ‘진달래 꽃’ 시집을 구입했는데, 그 책에 찍혀 있던 낙관을 보게 되었습니다. 김소월 선생이 자기 스승에게 책을 올릴 때 도장을 찍어 보냈는데 상당히 의미가 있어 보였습니다.” 이 관장은 바다 아래 있는 보물선을 발견하듯 인장이라는 보석을 책 속에서 발견했다. 1

이후 성인이 되어 소설가 오영수 선생 아래서 글을 배우던 시절, 오영수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특이한 인장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인장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오영수 선생님의 서재에 거북이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인장이 있었습니다. 갈 때마다 신기하고 예뻐서 어루만지고는 했습니다. 오영수 선생님께서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이 귀한 인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인장은 흥선대원군으로 유명한 석파 이하응의 진품 인장이었다.

어찌 보면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는 인장조차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에게 몸을 맡기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인장을 시작으로 그의 인장에 대한 열정과 발걸음은 오늘의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을 있게끔 만들었다.


“100원을 주고도 살 사람 없어”

 이재인 관장은 60년대부터 한국의 저명한 문인들이 사용하던 인장을 모으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며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장 수집은 올해로 벌써 50여년이 지났다. 문단에 몸담고 있던 덕분에 비교적 쉽게 얻은 인장들도 많았지만, 반대로 구구절절 편지까지 써가며 그의 열정과 집념의 대가로 얻은 인장들도 많다.

그렇게 평생을 바쳐 모은 것이 청록파로 잘 알려진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시인들의 인장을 비롯해 이광수, 염상섭, 현진건, 박종화, 김동인, 이효석, 김유정, 노천명, 이상, 서정주 김동리, 오영수 등 한국 근현대 문학사의 대가들의 존재감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인장이 무려 1,000여과에 이른다. 문인들의 인장 외에도 예산의 대표 위인인 추사 김정희와 흥선대원군 등 역사적 가치가 큰 인장도 보유 중이다. 또한 덴마크 국왕실 문장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보내준 스탬프 등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의 인장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이렇게 모인 인장들의 가치에 대해 묻자 이 관장은 “인장을 순수하게 액수로 계산한다면 아마도 100원을 주고도 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우회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한국문학사’나 ‘한국문헌사’의 한 자료와 사료로써 그 가치를 매기자면 그가 모으는 인장들은 엄청난 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 관장은 “문인들이 과거 인기리에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베스트셀러나 스터디셀러의 판권에 권위 있게 사용된 인장이라면 어디 이를 금은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작가들의 신표이며 권위와 명예의 상징으로 본다면 끝없이 애착이 가는 귀물이기도 합니다.”라고 반문하며 인장의 ‘값어치’보다는 ‘가치’에 의의를 두는 순수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애정이 있었기에 수많은 희귀한 인장들이 그의 품으로 왔는지도 모른다.

이 관장은 “지인들이 저에게 하필 왜 인장을 수집하느냐고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냥 ‘좋아서’라며 웃고 넘겼습니다. 그러나 인장을 수집한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 인장에 담겨 있는 작가들의 애환 그리고 명예와 권위를 지키는 일은 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인장들은 그분들의 역사의 일부이며, 이재인이라는 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라고 그 동안의 인장수집가로서의 삶을 회고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문인인장박물관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은 대한민국 최초의 인장박물관으로 지난 2000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에 건립되었다. 보통 박물관들이 존재를 알리기 위해 큼지막하고 세련된 건물과 갖가지 표지판을 설치하는 것과 달리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은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다. 덕분에 여행을 하듯 설렘을 앉고 지도를 보며 찾는 즐거움이 있다.

굽이굽이 운산리의 넉넉한 시골 풍경을 감상하면서 걷다보면 야트막한 둔덕 위에 2층 집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은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1층 자료실과 사무실, 2층 작가 집필실로 꾸며져 있다. 본 박물관 옆에는 2층으로 된 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1층 교육관에는 문인들이 사용하던 필통과 각종 인장이 새겨진 머그컵 2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재인 관장은 “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인 필통 역시 그분들의 삶이 묻어 있습니다. 여러 문인 선후배들이 직접 글귀를 남긴 소중한 필통을 소장할 수 있어 매우 영광이고 뿌듯함을 느낍니다.”라고 말한다.

2층 전시관에는 소장전시품 하나하나가 보물급인 인장들이 즐비해 있다. 이 중에서도 한켠에 우두커니 서있는 한반도 모양의 장식품에 눈이 간다. “이 곳을 찾는 문인들의 막도장을 모아 한반도 모양의 판에 모두 박은 것입니다.”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은 이 관장이 예산고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던 때부터 문교부 공보관, 경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의 원고료, 강사료 등을 아껴 모은 것에 지인들의 후원금이 보태져 그 규모를 점차 확장해 왔다.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단체로 방문해 현장 견학과 체험학습을 통해 한국의 인장과 문인들에 대한 재미있는 교육을 하고 있으며, 매년 명사들을 초청해 시낭송, 토론 등을 하는 ‘문학과 전각과의 만남’이라는 심포지엄 행사도 열고 있다. 특히 외지에 위치한 지역주민들을 위한 ‘우리동네 책읽기’. ‘글쓰기 사랑방’등의 인문학 강좌와 행사는 지역사회의 문화발전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시대의 성장에 거름이 되는 작가 / 시대에 거름을 주는 작가

 왕성한 집필활동을 해온 이재인 관장은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20여권의 수필집과 소설을 집필했다. 그 중에서도 1989년 월남전을 무대로 분단의 아픔과 이데올로기의 질곡을 집중적으로 파헤친『악어새』는 한국과 일본서 각각 10만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실제 이 관장은 1967년 베트남전에 참전했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인 묘사로 양질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소설『악어새』는 단순한 경험담이 아닌 이 관장이 당시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비판의식을 잘 보여준다. “당시 책을 발간할 때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는 민주화 열기와 아울러 반미(反美)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외세의존성과 민족자주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대였습니다. 책에서는 한국인 기술자와 월남 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한국에 살게 되며 반(半)한국인으로서 갖고 있는 시각을 빌려 한국사회의 당시 문제를 파헤치려 노력했습니다.”

과거 많은 작가들이 글을 통해 시대를 투영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검열이 심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흥미를 유발하는 소재로 소위 ‘팔리는 글’을 써서 ‘대박 작가’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랐다. 과거뿐 아니라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관장은 당시 한국근현대의 젊은 문인으로서 시대를 책속에 옮겨 시대가 발전하는데 거름이 되는 작가로서의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노익장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사는 이야기를 글로 남기려는 이 관장은 올해 『우리나라 맛자랑 별미기행』이라는 여행수필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을 통해 이 관장은 지방 곳곳에 숨은 별미를 지역인사와 함께 돌아다니며 지역음식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 줄 예정에 있다.

 

이재인 관장은 현재 교단에서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인으로서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박물관협회 이사 12명 중 한명이며 한국사립박물관협회 부회장을 맡아 국내 박물관 및 미술관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교수,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협회임원이라는 권위 있는 자리에 위치해 있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시골에서 농사나 하는 ‘농사꾼’이라고 소개했다. 이처럼 이 관장은 명예와 권위라는 화려한 옷을 입으려 하지 않고, 사람냄새로 뜨개질 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앞으로 시골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방의 문화발전에 기여하며 살고 싶다는 이재인 관장. 문인으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대한민국 유일의 문인인장 ‘보존가’로서 그가 뿌린 씨앗들이 건강하게 자라 ‘문화 대풍작’을 거두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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