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미술의 조화로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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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아가는 것은 전통을 중시하는 현대인이 갖춰야 할 필수조건이다. 문학 뿐 아니라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다듬고 현재를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는 곧 역사(歷史)가 되기 때문이다. 수 년 전 숭례문 화재사건은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되새기게 된 계기가 됐다. 옛 서적과 문방사우(文房四友)를 하나 둘 수집하던 정정례 관장은 과거를 보존하는 역사의 보금자리 ‘삼정문학관’을 짓고 손님 맞을 채비에 여념이 없었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 중 ‘청국장 편’에서 인각(印刻)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인사동에서 수십 년간 도장을 만들던 노인은 기계에 밀려 점차 기술자들이 떠나간다고 탄식한다. ‘젊은 사람들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알겠나..’ 읊조리는 노인의 쓸쓸한 모습은 진중하다. 역사가 돼야 할 문화가 쇠퇴(衰退)되는 현실에 외치는 조용한 일갈(一喝)이다.
정정례 관장 역시 시인으로 문학 활동을 하며 사라져 가는 문학의 발자취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시대를 대변했던 문인들, 그리고 그 분들의 좋은 글들이 세대의 흐름에 따라 잊혀져 가는 것이 너무 아쉬웠어요. 지금 다시 봐도 훌륭한 작품들이 많은데 그 작품들이 실린 책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불과 1세기도 지나지 않은 귀한 문헌자료들이 사라져 가는 걸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제가 할 수 있다면 과거의 작가들의 작품을 한 곳에 모아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문학관을 만들게 됐습니다.”

정 관장이 문학관을 설립한 계기는 우연히 방문하게 된 원주의 ‘박경리 문학관’이었다. 그곳에서 박경리 작가의 발자취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문학사의 보금자리를 간직하고 싶었다. 자신의 호(號)를 본딴 삼정(三井) 문학관을 용인의 조용한 외곽에 지었다. 전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고서적과 시화집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난 20여 년간 수소문을 통해 가치 있는 자료를 수집하기도 하고 서점을 뒤져 문헌적 가치가 높은 책을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집한 귀한 자료들은 삼정문학관에 고이 모셔져 단순한 고서적에서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자료가 됐다.
2006년 등단 이후 인고의 고통으로 작품 활동을 하던 정 관장은 시 한 편, 소설 한 편을 쓰는 데 드는 각고의 노력을 잘 알게 됐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세월이 지나며 잊혀지고 지워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가능한 많은 고서적들을 모아 보관하는 것이 공간을 차지하고 비용이 드는 등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녀는 분명 후세에 이 작품들이 문학사에서 활용될 것이라고 문학관을 운영하는 취지를 밝혔다.


 
인연(因緣), 故 김규동 시인

그녀가 문학관에 대한 구상을 古 김규동 시인에게 밝혔을 때 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문학관의 한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김규동 시인의 생전 작품들에 대해 물으니 그가 보유하고 있던 과거 조선일보 시각전 개최 당시의 작품들을 기증받았다고 한다. 평생동안 만든 시 서각(書閣) 작품들을 삼정문학관을 개관하며 모두 기증받았을 정도로 생전의 인연이 두터웠다. 또한 문학관에 대한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그녀에게는 은인과 같은 분이다.

“문학관 개관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아요. 김규동 선생님이 생전에 많이 도와주셨고, 지난해 처음 열게 된 ‘문학 강연 및 시 낭송회’에도 이동천 시인, 최종천 시인, 최순섭 시인, 민영 시인, 이은봉 시인, 맹문재 교수 등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죠. 앞으로 강연회와 낭송회를 더 자주 열어서 삼정문학관이 문학 교류의 장이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실제로 문학관에서 정 관장이 사용하는 나무 책상도 김 시인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다. 과거 가정집에서 평범하게 사용됐던 집기들이 현재에 이르러 잘 보존된 역사의 유물로서 과거를 대변하는 것을 보면 이 책상 역시 100년 뒤가 보이는 듯하다.
문학관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정 관장이 화집(畵集) 하나를 건넸다. <來日(내일)을 위한 오늘의 傳說(전설)>이란 제목의 책을 펼치니 탁 트인 평야가 펼쳐졌다. 정 관장의 고향인 전남 영암에 있는 ‘삼정문학공원’과 삼정문학관을 한데 묶은 사진집이었다. 시비(詩碑)를 비롯한 공예 유물들이 1,500평 공간 위에 조성돼 있는 문학공원은 새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문학에 대한 정 관장의 애착이 공원 곳곳에 배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의 문화적 소비

문학관을 나서면 멋들어진 적송(赤松)에 둘러싸인 공간 안에 나란히 선 또 하나의 건물이 보였다. 2층까지 탁 트인 건물로 들어가니 이번에는 ‘미술’이 보였다. 한국인 특유의 수묵화, 풍경화부터 해외 유명 작가 앤디 워홀과 클림트의 그림까지 다양하게 전시된 미술관이었다. 정 관장은 이곳에서 개인전 및 단체전을 개최하며 예술을 나누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미술이라고 하면 아는 사람만 아는 전문분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미술관 뿐 아니라 길거리 벽화도 같은 맥락의 미술입니다. 그림을 보며 뭔가를 느낄 수 있고, 그림을 봄으로써 심적 변화를 느낄 수 있다면 누구든지 그림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읽을 수 있거든요.”

나무 계단을 통해 2층 실내 테라스로 올라서면 작은 카페를 연상시키는 테이블이 배치돼 있고 공간 곳곳에 미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고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장소다. 1층의 바에서 간단한 식음료를 즐기며 시간을 문화적으로 소비할 수 있을 듯하다.
차후에 있을 전시회를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는 정 관장은 눈의 즐거움 뿐 아니라 귀의 즐거움도 준비하고 있다. 같은 그림을 감상하더라도 배경에 흐르는 음악에 따라 다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웃음을 안고 갈 수 있도록 소소한 부분까지 신경쓰고 있었다.
그녀의 호 ‘삼정(三井)’에 착안해 ‘문학과 미술이 있으니 음악만 있으면 삼정예술관의 완성’이라고 제안하니 정 관장이 무릎을 쳤다. 이제는 수집품이 된 LP들을 한데 모아놓고 국내 음악사(史)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음악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녀는 ‘보유 중인 레코드판이 많다’며 음악관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학, 미술, 음악을 한 곳에서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은 아직 없다. 미술에 이어 음악까지 즐길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종합예술관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성인에게는 향수로, 아이들에게는 역사로 각인될 삼정예술관이 기대된다.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이 아닌 그림이었다. 가로 3미터는 족히 됨직한 창문의 차양을 걷으니 마침 눈이 오고 있었다. 울타리를 둘러 심어진 적송들과 미술관 앞 정원에 겹겹이 쌓여가는 눈의 조화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됐다. 시선을 떼지 못하고 서 있었더니 예상했다는 듯 한 정 관장의 웃음소리. 창문에서 보이는 모습은 그녀의 자랑 중 한 가지였다. 비가 오면 수채화, 눈이 오면 수묵화가 되는 창문의 모습은 매일, 매시간 그 모습을 달리하는 ‘생화(生畵)’였다.

누군가 ‘직업은 자기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을 택하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평생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옛 서적들과 문학의 역사가 충만한 문학관의 시인, 눈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미술관의 예술인으로서 정정례 관장은 행복해 보였다. 더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삼정문학관과 함께 성장하겠다는 그녀의 포부가 기대된다. 언젠가 미술관 옆에 음악관이 지어진다면, 하루 시간을 비워 그곳을 찾아 정 관장과 함께 예술에 시간을 쓰고 싶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시간의 기부(Time Donation)’가 될 것이다.
 
삼정문학관에서

정정례

청솔매 한 마리 타고 오르는
솔바람 소리에 귀가 쏠려
낙엽 쌓인 뜰로 불려나갑니다
사방 둘러쳐진 울타리 속은 고요하고
흰 건물 안 냉기 가득 합니다
나 여기 가두어 두고
누군가 과거와 미래를 내통하고 있습니다
낯설고 가슴 뛰던 순간들이 잔잔히 젖어옵니다
지워지고 잊혀져가는 그것들 애써 붙들다가 문득
그것들에 내가 덜미 잡힌 것을 알았습니다
겨울 햇살이 허공을 서서히 굴러가는 소리 들립니다
먼저 간 것들의 자취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혈관 속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영혼들을 만나야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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