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기와이야기] 중국 기와와 한국의 기와

  • 입력 2023.05.25 10:01
  • 수정 2023.05.25 17:51
  • 기자명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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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어느덧 기와 5회째다. 처음부터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친 통일신라시대 암막새의 문양을 주로 다루었다. 경주에 모두 15년 동안 살면서 수많은 발굴 현장을 참관해 오며 깊이 생각했다. 나의 원래 주 전공은 불상이었으나 지금은 전 세계의 건축, 조각, 회화, 도자기, 금속기, 복식으로 확장하여 폭넓게 그리고 매우 깊게 연구하고 있다. 최근 도자기 연재를 신문 한 면 전면에 기고한 지 2년이 지나고 있을 즈음, 도자기 연재를 <피플투데이>라는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2000년에 박물관 퇴임 기념으로 <통일신라 기와 특별전>을 처음 기획했는데, 우리나라에서 기획한 최초의 대규모 기와 전시였다. 그러면 왜 퇴임 기념으로 하필이면 기와를 택했을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양을 새긴 기와는 통일신라시대 기와라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은 많지만, 특히 암막새와 수막새, 그리고 추녀마루 기와와 사래 기와에 중요한 문양이 많다. 물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의 기와를 다룰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고도의 상징을 띤 기와를 창출하고 있음을 아는 기와 전공자도 드물다. 물론 시기적으로 이미 중국의 西周(기원전 1027~771년) 시대에서 창조되었으나 반원형 형태만이 있는데 왜 그런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고구려가 그런 반원형 와당을 만든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고구려 유적은 발굴된 바가 그리 많지 않지만, 한성백제의 기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성백제 시대(BC 18년 ~ AD 475년)의 백제는 수도(왕도)를 한성(서울)에 두고 한반도의 가장 풍요로운 지역에 자리 잡으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져왔다. 백제를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었던 왕은 제13대 근초고왕(?~375)이다. 『삼국사기』에는 그를 ‘체격과 용모가 빼어나고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근초고왕은 왕위에 오르자, 한반도 북부지역과 중국의 동북부 지역을 지배하던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당시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크고 강력한 나라로 백제보다 3~4배 넓은 땅을 가진 나라였다. 근초고왕은 한반도에서 백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대외적으로도 팽창하는데 중국의 대륙에서 통일왕조가 무너지고 북중국이 혼란해진 상황을 틈타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전쟁에서의 승리뿐만이 아니라 근초고왕은 중국 동진, 일본열도의 왜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서 동북아시아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백제의 이러한 전성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왕, 장수왕과 같은 걸출한 왕들이 배출되면서 백제는 위기를 맞게 되는데, 서기 475년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은 전사하게 되었다. 고구려군은 한강 북쪽으로 철수하였으나 이미 폐허가 되고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곳을 왕도로 유지할 수는 없었으므로 개로왕의 동생 문주가 남쪽의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겨 백제를 이어 나가게 되었다. 500여 년의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바야흐로 웅진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국가 성립을 기원후 3~4세기로 잡고 있다. 신라는 가장 늦다. 고구려는 이에 비해 가장 이르다. 약 2세기부터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역사학자마다 의견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각각 다른 국가성립 시기에 관심이 있는 까닭은, 국가성립과 기와 창안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통일신라가 시작하는 7세기 후반에 궁궐터나 사찰터에서 출토하는 기와는 그 이전 삼국시대와 전혀 다르기에, 그 점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국가로 성립하면 국내는 물론 중국과의 관계가 달라져서 중국의 역사서에 그 나라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국가의 성립 후에 웅장한 궁궐과 사찰을 짓는데 그때 건축에 사용되는 기와들이 각각 다른 문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한 국가의 수도에서 기와가 주로 출토된다.
삼국의 기와를 다루기 전에 중국 기와의 창안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중국 기와를 알아야 한국 기와도 그 문화적 위상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기와’는 통칭이고, 와당(瓦當)은 수막새와 암막새를 가리킨다. 그런데 기와 특히 와당의 중국 역사는 3000년이 넘는다는 것임을 알면 아마도 매우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와당의 드높고 깊은 상징을 필자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드러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의 그리스 기원전의 기와도 세계 최초로 풀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2022년부터 6회에 걸쳐 통일신라 암막새만 소개해 드렸다. 왜 그랬을까? 수막새는 왜 소개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수막새가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데 왜 수막새부터 연재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암막새는 중국에서는 만들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기에 그 시대의 암막새만을 소개해 드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음에 설명해 드릴 것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우선 고구려 수막새 몇 점을 현 학계의 명칭 그대로 소개하고 다음 호에 나의 의견을 피력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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