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예술 '단색화', 한국미술사에 새길 박서보 화백의 발자취

박서보 화백

  • 입력 2021.03.31 13:34
  • 수정 2021.05.17 15:15
  • 기자명 박예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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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춘호 작가 제공
사진=김춘호 작가 제공

한국의 전통과 미학을 담은 단색화는 ‘수행의 예술’로 불린다. 작가 고유의 기법을 활용한 반복 작업을 통해 캔버스를 채워나간다. 그중에서도 박서보 화백은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칠한 후 물감이 마르기 전 짧은 시간 동안 연필로 빠르게 그어대는 <묘법(Ecriture)> 시리즈를 선보여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박서보 화백은 1957년 한국 앵포르멜 Informel(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서정적 추상화의 경향)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젊은 작가들을 모아 현대미술가협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했다. 박 화백은 홍익대 미대 출신으로 30년 넘게 홍익대 미대 강단에 섰고 홍익대 미대 학장을 지냈다. 평생 그림을 그렸으나 인지도에 비해 그림이 잘 팔리는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미술시장에 단색화 열풍이 불며 세계 주요 컬렉터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세계 굴지의 갤러리인 영국의 화이트큐브에서는 2016년부터 2021년 3월 대규모 회고전에 이르기까지 4차례의 개인전이 열리기도 했다. 특히 2016년 화이트큐브 첫 전시에서 오픈 전부터 완판 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했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산 증인, 박서보 화백을 피플투데이가 집중 조명했다.

 

생애 최대 프로젝트, '박서보 미술관' 설립
박서보 화백과의 만남을 위해 찾은 연희동 자택은 주거지이자 작업실이자 전시장의 역할을 두루 하는 다기능 공간인 기지(基地. GIZI Exhibition and Residence)다. 조병수 건축가가 설계한 기지는 1층 갤러리 공간, 2층에는 박 화백의 작업실, 3층과 4층은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은 박 화백이 세상을 떠난 뒤 ‘박서보 기념관’으로 활용될 것을 염두에 둔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종로구 구기동과 경북 예천에 각각 미술관을 설립할 예정이다. 그의 인생 최대의 프로젝트인 셈이다.
구기동에 설립될 미술관은 단색화에 초점을 맞춘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 예천군에는 박 화백의 시대별 작품 변천사를 전시하는 ‘박서보 미술관’으로 지어진다. 특히 예천 박서보 미술관은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에게 설계를 의뢰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두 거장의 만남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2009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매일 하루 14시간씩 작업했으니 작품 수도 상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그림을 함께 즐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천에 세워질 미술관이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도 으뜸가는 미술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페터 춤토르에게 친히 부탁을 하기도 했지요. 춤토르는 ‘침묵’, ‘고요함’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건축가입니다. 그의 철학이 내가 평생 매달려온 단색화 작업과도 일맥상통하기에 더욱 각별하고요."

 

수행하는 예술가, 한국의 색을 담다
단색화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겐 하나같이 상징적인 기법이 존재한다. 박 화백에겐 ‘묘법’이 그것이다. <묘법>은 수백, 수천 번 반복하는 긋기와 붓질로 탄생한 작품이다. 연필로 긋는 동작을 수행하듯 끊임없이 반복하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형상을 만들어내고, 그 형상은 수행의 결과물인 셈이다. 집중력을 응축해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상당한 지구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초기엔 수많은 연필 선으로 이룬 묘법, 중기엔 즉흥적인 연필의 궤적을 보여주는 지그재그 형태의 묘법, 후기엔 간결한 선으로 이뤄진 묘법으로 형태를 발전시키며 작품 세계를 굳혔다. 또한 단색화는 색상을 감성 표현을 돕는 도구로 쓰기 때문에 많은 색을 차용하지 않는다. 박 화백은 한국만이 지닌 고유한 색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우리는 흰색과 검은색을 두고 그냥 하얗다, 까맣다고 표현하지 않고 선명함이 조그만 달라져도 희뿌옇다던가, 거무스레하다던가 하는 다양한 표현을 구사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 고유의 표현이자 색이지요. 표현만큼이나 색도 다양합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거무스름’한 색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부엌에 앉아 불을 떼던 자리에 거무스름해진 벽. 그 벽 위에 눈을 감고 속가락을 대면 무한대로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것이야 말로 ‘자연’ 아니겠습니까. 이 자연의 색을 구현해내기 위해 1986년부터 무던히도 애를 썼지요. 수행하듯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자,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서 그래요. 부러 자연을 담으려고도 애를 쓰지요. 자연이 내 선생입니다."

박서보 화백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보고 "박서보 만큼 검은 색을 아름답고 깊은 정서를 느끼게끔 그리는 사람은 없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가족의 눈으로 보는 박서보 화백
박서보 화백의 화업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딸이자 미술심리치료사인 박승숙씨가 집필한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에도 잘 드러나 있다. 승숙씨는 책을 펴내며 서문에서 “한국 문화사, 좁게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딸인 제게 오해를 받았던 것만큼 아버지는 남들에게도 잘못 이해되고 있었다”고 적었다. 

승숙씨는 스타 작가로 등극하기 이전의 박서보 화백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193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몸소 겪은 역사의 산 증인. 그의 인생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고스란히 담았다.

"아버지는 20세부터 평생 작가로만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일반적인 의식을 한 발 앞서 전위적 미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잘 알면서도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는 신념으로 우직하게 한길만 걸어가셨지요. 외국 사람들은 한국 상황에 대해서도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만 해도 아버지 말씀을 듣고서야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를 새삼 이해하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겪은 전쟁의 충격, 같은 시대를 겪으며 작업했던 김창열·이우환 등 동료 작가들, 작업에 대한 고민과 갈등 등 그리 멀지 않은 과거임에도 까마득히 잊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책을 남깁니다." 

이와 더불어 박서보 화백의 곁을 묵묵히 지킨 그의 아내, 윤명숙 여사 에세이집 <나로 말할 것 같으면-Yes, I am>을 통해서도 박 화백의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와 더불어 윤명숙 여사의 삶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다. 경제력이 없던 가장이었지만 단색화 거장으로 이제 높은 작품 값도 자랑하는 박 화백은 “현대미술 운동한답시고 가정을 알뜰히 보살피지 못한 나대신 아이들 대학 갈 때마다 부엌에서 새우잠 자곤 하던 당신. 틈틈이 글을 쓰는 것 같더니, 자랑스럽다. 내 아내”라고 응원했다.

 

변화하되 추락하지 않는 예술가, 박서보
마지막으로 박서보 화백은 스스로의 화업 인생을 돌아보며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화해도 추락한다.”는 좌우명을 언급했다.

"세상은 변화하는데 나 혼자 그 자리에 서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말아요.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반대로 잘못 변화해도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변화는 오히려 스스로를 갉아먹게 되지요. 저는 이 말을 제 묘비에도 새길 생각입니다. 변화하면서도 추락하지 않는 예술가로 기억되겠습니다."

Profile

수상내역

2020 제40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공헌 예술가상 수상, 한국 예술 평론가 협의회, 서울
2019 제64회 대한민국 예술원상(미술부문) 수상, 대한민국 예술원, 서울
2018 아시아 아츠 게임즈 체인저 상, 아시아 소사이어티, 홍콩.
2015 40주년 기념 시각미술상, 허쉬혼 뮤지움, 워싱턴, D.C, 미국.
2015 제12회 이동훈미술상 본상
2011 문화훈장 은관
1999 제1회 자랑스러운 미술인상, 한국미술협회
1995 제44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미술부문), 서울시
1994 문화훈장 옥관
1987 제1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상 대상
1984 국민훈장 석류장, 총무처
1979 제1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부문 : 대통령상), 문화공보부
1972 대통령 표창
1961 세계 청년화가 파리대회(Jeunes Peintres du Monde à Paris) 1위상

주요미술관 소장

해외
-K20, 노르트라인-베스트 팔렌 주립 미술관, 뒤셀도르프, 독일. (2020)
-베넷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 일본. (2019) 
-세르누치 미술관, 파리 시립 아시아미술관, 파리, 프랑스. (2018)
-폴라 미술관, 하코네, 일본. (2017)
-MOMA (뉴욕 근대 미술관), 뉴욕, 미국. (2015)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 시카고, 미국. (2015)
-허시혼 미술관, 워싱턴 DC, 미국. (2015)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미국. (2014)
-아부다비 구겐하임, 아부다비, 아랍에미레이트. (2014)
-엠플러스 미술관, 홍콩. (2014)
-유즈 미술관, 상하이, 중국. (2014)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기금 콜렉션 (FNAC), 파리, 프랑스. (2007)
-미에현립미술관, 미에, 일본. (2001)
-시모노세키 시립미술관, 시모노세키, 일본. (1992)
-히로시마시현대미술관, 히로시마, 일본. (1988)
-도야마현립근대미술관, 도야마, 일본. (1987)
-오하라미술관, 구라시끼, 일본. (1986)
-도쿄도현대미술관, 도쿄, 일본. (1984)
-후쿠오카시미술관, 후쿠오카, 일본. (1977)

국내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2019)
-대구미술관, 대구. (2011)
-경기도미술관, 안산. (2007)
-뮤지엄 산, 원주. (2007)
-포스코 미술관, 서울. (2001)
-토탈 미술관, 서울. (2001)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1)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1998)
-갤러리 63, 서울. (1994)
-광주직할 시립미술관, 광주. (1992)
-한림 미술관, 대전. (1992)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서울. (1992)
-선재 현대미술관, 경주. (1991)
-서귀포시립 기당미술관, 제주도. (1991)
-워커힐아트센터, 서울. (1986)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79, 1983)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 (1976, 1981, 1993, 2011)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1975)

주요콜렉터 소장

해외
-스티븐 코헨 콜렉션, 스탠포드, 미국. (2016)
-라초프스키 콜렉션, 달라스, 미국. (2015)
-울리 시그 콜렉션, 스위스. (2015)
-조제 이코노무 콜렉션, 아테네, 그리스. (2015)
-알렉산드라 먼로 (개인 콜렉터), 뉴욕, 미국.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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