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표현주의 화가, 서양화가 성하림의 작품 세계

서양화가 성하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하림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지 이십여 년, 한국 화단의 유의미한 작업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작품세계의 변천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여류 화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설렜던 과거를 회상한다. 여류 화가는 가정이 있고 여성의 신체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작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여건인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40여 년의 화업은 인고의 시간을 버텨낸 창조에 대한 열의일 것이다. 단순히 그림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성하림의 <달 항아리에 핀 꽃> 연작은 그녀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소재들의 완성으로, 모든 창조를 실험하고 기쁨을 따라간 흔적들이 모여 집대성한 결과다.

성하림이 몰입해 온 <달 항아리에 핀 꽃> 연작들을 보면, 화가가 얼마나 사숙하여 감정을 길어내 자기화한 흔적, 그리고 영적, 내면적 세계로의 전환을 엿볼 수 있다. 80년 초반부터 그려온 항아리 작업이 현재의 달 항아리와 연장선상에 있지만, 전혀 다른 화의(畵意)를 지닌다. 이전과 다른 것은 보이지 않은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다는 말은, 자신의 내면화된 것을 주관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다.

과거의 화가들은 무언가를 보고, 그것을 그렸다. 그래서 예로부터 보이는 것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그림의 존재 의의는 장식이나 사진 같은 그림이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얼마나 잘 그리느냐로 화가의 역량을 평가하곤 했다. 그러나 휴대폰에 사진 기능이 담기면서 사진기가 보편화된 지금은 보이는 것을 얼마나 잘 그리느냐는 무의미하게 되었다. 화가들은 이후 내면적 세계로 빠져들기 위해 추상적 사고를 시작했는데, 추상의 관념은 철학적 요소와 사물의 본질적 추구를 뜻하므로 다양한 양식의 혼돈에 이르는 개성적 추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추상적이라는 말에는 영적인 세계로의 진입을 뜻하는데, 그동안 인류의 미술이 영적인 면을 드러낸 흔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종교화의 영역에서 일부 다뤄지기도 했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면서도 영적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는데, 예로부터 인류는 그림을 통해 신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왕조나,  귀족, 상류사회도 미술을 빼놓고 자신들의 정신적 정체성을 정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술은 인류의 마음을 충전시키는 영적 배터리 역할을 했다.

성하림의 달 항아리에 핀 꽃은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달 항아리는 인간과 자연의 정신을 의미하고, 하나 되어 나타난 아름다움이 꽃이다. 도가의 도법 자연 사상과 유사하게, 기물이나 꽃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한다. 정신에 담긴 에너지가 발현하여 피어나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인간이 내면적 성장을 하는 행복을 그린다.

절에 가면 벽화나 선화나 불상이나 불화 모두 그림이다. 천주교에 가면 건축물에 아예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유리에도, 벽에도, 천정에도 있어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 인류사의 큰 에너지를 느끼고자 전 세계 사람들은 이탈리아까지 찾아간다. 아주 작은 그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는 사람들이 그윽하게 바라본 눈빛, 즉 관측 에너지와 화가가 당시 그렸던 기가 합해져서 명작, 명품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성하림의 달 항아리는 한반도의 내면이 피어나는 세상을 그렸으며, 민족의 정서, 발달, 창달에 이르는 창조의 희열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어떤 얽매는 틀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어떤 화풍이나 화법에 집착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 기쁨을 따라가며 성하림의 조형언어로 된 표현주의적 작업을 한다. 필자는 이러한 성하림의 작품 세계관을 한국 표현주의라고 부르지만, 정작 작가는 내면화된 것이 영성으로 나온 것이라서 사실 거기에도 얽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표현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많은 작가들이 영적인 세계나 내면적 세계를 그리는 것에 대해 말하면, 종교적 그림에 심취하는 것으로 내면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세계로의 진입이지 화가 본인의 영적 세계는 아니다. 이 영적 세계라는 것은 내면화된 자신을 만나는 것으로 창조의 근본자를 만나는 것과 같다. 신께서 인간을 자신과 닮게 만드셨다는 말씀과 고타마 싯다르타께서 모든 것에는 인과관계에 의해 생기는 인연에 의해 희로애락이 생긴다는 통찰을 한 것은, 인간의 삶이 곧 신의 손길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종교적 회화 양식도 중요하지만, 이제 작가가 본인으로의 여행, 신의 손길로 빚어진 위대한 세계가 담긴 내면으로의 표현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발상과 주관적이고 내면적 세계를 그리는 것을 필자는 표현주의라고 명명한다. 그런 면에서 지난 몇 년간의 근작들은 성하림이 한국 표현주의의 유의미한 여류 화가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자신만의 느낌을 담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기만의 감정을 마구잡이로 표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제된  추상을 그리려면, 정신적 세계가 확장되어야 하고, 기존에 그리던 화풍이나 화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이 있어야 하며, 본연적 의미의 창조의 치유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대상을 원본의 겉형태가 아니라 에너지로 이루어진 경계를 그리게 하는 것이 바로 추상적, 한국적 표현으로는 비구상적 표현이다. 그것을 통해 추상적이고 비구상적인 어떤 느낌, 감정으로 본 대상이 그려지는 것이다. 겉모습의 복잡성, 객관성과 보편성을 넘어간 사물의 근본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표현주의의 회화, 내면으로의 작업이다.

 

성하림이 심혈을 기울여 발표해 온 <달 항아리에 핀 꽃> 연작에서 달 항아리에 핀 꽃이 세상에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화가의 새로운 세계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꽃과  달 항아리를 그린 회화는 그녀만의 내재되고 응축된 에네르기가 있다.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의 느낌이다. 달 항아리는 전 세계를 통틀어 오직 조선시대에, 우리 한민족만의 미학을 뽐낸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며 다시 차오르는 모습에서 도공은 아무 문양도 첨가되지 않은 둥그런 모습을 표현했다. 화가는 그 느낌과 감정을 사숙해서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신만의 표현 언어를 창조했다. 이 표현 언어는 이 세상에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오직 성하림만이 그릴 수 있는 언어, 자기만의 세계였다. 아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성하림이 바라본 달 항아리에는 꽃이 만발하고 행복이 그득 담겨있다.

김환기를 비롯하여 한국 추상을 이끌어간 거장들의 숨결에 한국 표현주의 대가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하림은 대중들과의 소통을 위해 수십 년간 구상적 작업을 했지만, 점차 추상적 영역으로 작품세계가 확장되면서 자기만의 언어가 표현되고 있다. 미적인 것을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내면세계, 영적인 세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림은 인간이 가장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상징임과 동시에, 인간이 신을 닮은 자녀임을 깨닫게 하여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성하림의 달 항아리 그림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인간이 물질적 영역 너머의 세계에서 창조된 놀라운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며, 아름다움을 통하여 예술적 인지로 인간이 가진 영적인 힘, 정신의 힘, 감정의 힘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준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기쁜 일이면서도 고된 작업이다. 아니 치열하다 못해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전투적 상황에 비할 수 있다. 완성되기 전까지 하나의 표현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경험과 감정을 쥐어짜며 창작의 고뇌와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기쁨과 행복을 예언하는 화가의 그림은, 그림을 그리면서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이 느끼며 작업하는 과정은 일종의 기도 혹은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성하림 회화의 대변혁은 감정에서 비롯된다. 감정의 행복감 속에서의 작업, 희열, 감사 속에서 그의 화풍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성하림이 모든 기물에서 달 항아리와 꽃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달 항아리와 꽃을 그리면, 그리는 화가와 보는 소장자가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꽃은 번영과 사랑과 행복을 뜻했으며, 달 항아리는 복을 기원하며 충만하고 그득 차며 생명의 잉태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는 꽃과 정물이라는 자신의 세계 안에 달 항아리를 그림으로써, 내면적 상황을 컨트롤하며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창조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성하림의 정물, 달 항아리의 표현은 숨겨진 메시지가 많다. 지금의 미술 문명은 사진처럼 잘 그리느냐 마느냐에 불과하다. 아직도 사진처럼  잘 그렸다거나 못 그렸다는 식으로 보는 것 안에서 화가의 작품을 평가하는데, 이것은 18세기 미술에 불과하다. 현대를 사는 지금, 현대의 미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적 영역을 주관적 세계로 창조하여 다양성을 길어오는 것이다. 이 다양성의 창조 중에 인류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의 지혜가 그림 속에 상징과 은유와 정신의 녹임으로 녹음되어 재생되는 것이다.

 

성하림은 자신의 "그림을 보고 정신적, 영적 기쁨이 충만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에너지가 고갈된 화가들의 그림은 결코 벽에 걸지 않는다. 내 기가 오히려 거기에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미술사 이야기에서 풍수적 이야기를 언급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림은 나의 기를 보충해주고 원기를 북돋우는 그림이어야 나에게 맞는 작품이다.

그림이 가진 목적은 단순히 장식하거나 미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림을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처럼 그리는 사람이 있고, 마치 시인처럼 마음속 기쁨이 흘러나와 그 환희가 정제되어 그려지는 그림이 있으니, 바로 성하림의 표현이 그렇다!

 

저작권자 © 피플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