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애 칼럼] 지금 우리, 서바이벌(survival)이 아닌 리바이벌(revival)하라

  • 입력 2020.06.18 17:14
  • 수정 2020.06.18 17:15
  • 기자명 조신애 KPC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로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위협 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평소 너무 익숙해서 좀 소홀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더 자주 묻게 되었다. 때로 형식적 이였던 “잘 지내지?” 라는 단어가 최근에는 좀 더 정성스러워졌다. 힘든 시기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생활은 좀 나아졌는지, 아픈데 는 없는지 사려 깊게 안부를 묻는다.

그간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살아왔다. 이렇게 인간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해 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 시간, 그동안 삶을 우리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무모한 통제권을 내려놓는 과정일지 모르겠다. 유한인 인간이 사실은 더 높은 차원인 무한 앞에 철저히 겸손해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계가 없는 듯 달려온 인간의 삶은 오리무중에 빠져버렸다. 언제 끝날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확실히 아는 이가 없다. 전에 없던 그 모호함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조급하게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일들이 있다. 시소에 한쪽에만 힘을 주면 다른 한쪽이 튀어 올라오듯 요즘의 재난급 불행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새롭게 움트고 생명 돋는 신비로운 일들도 생겨나고 있다. 하찮았던 것들이 다시 보인다. 소중했던 것들을 다시 찾게 되고,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재발견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삶의 마비' 앞에 재조명된 그 반대편의 회복(revival)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예상치 못한 시련, 고통! 과연 어떻게 바라볼까? 삶에 폭탄일지 모를 사태에 작은 위트를 가져보라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친절한 태도와 연민의 감정을 가져보라는 것이다. 내게 닥친 시련을 단지 괴로운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결국 그것에 지배당한 패배자가 되거나, 희생자로만 살아가게 될 것이다. 피로하고 노곤했던 생활. 늘 반복되던 일, 지루했던 일상, 가능성이 사라진 관계에서 길을 찾는 자가 있다면 이제 다르게 살아볼 시간이다.

그 무엇을 넘어서는 일은, 그 모든 것에서 얽매인 부정적인 감정을 덜어내는 것이다. 공포를 걷어내고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아픔을 친절하게 바라보라. 그런 세상을 연민하라. 이 일들은 어쩌면 마치 필요했던 퍼즐의 한 조각처럼 우리가 꼭 경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고통을 어서 빨리 벗어나려고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든 생존하기에만 급급했던 일차원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 감각을 매 순간 일깨울 수 있다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삶에 대한 작지만 새로운 시선을 장착 할 수 있다면, 험난하고 고통스런 경험 한가운데서 우리는 고도의 다른 차원의 문을 열게 된다.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긴 어둠과 고독을 견디고 우아한 날갯짓을 하며 자유롭게 다시 태어나 듯, 고통의 한가운데서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오차원의 문을 열고 희망에 닿아질 것이다. 그것은 겨우내 말라붙은 가지에서 파릇한 잎이 솟아나듯, 마치 죽음 가운데 부활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도 같은 기적이다.

절망의 땅에 부는 회복의 바람이다. 회복은 어디 먼데 있는 게 아닌 우리 지금 이 자리에서 늘 만나던 사람들,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얼마 전 한 친구와의 에피소드에서 작은 회복의 경험을 느겼졌다. 늘 바빴던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친구는 서울의 수서 쪽에 일터와 집이 있었고 친구와 나는 서로 서울의 정반대쪽에 거주하고 있어서 평소 일이 바쁠 때엔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약속을 잡으면 시간이 좀 더 여유 있는 내가 매번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곤 했다. 하지만 약속이 취소되는 일이 다반사였고, 대부분 늦은 시간에 만나야 하기에 돌아올 때엔 택시를 타고 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번엔 작정을 했는지,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오겠다고 한다. 전에 없던 일이라 왠지 들뜬 마음이 들었다.

준비를 하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다. "혹시 차 보내 주면 올래. 갈 때도 차 보내 줄게." 여타 부타 설명 없이 보내진 메시지에 순간 ‘아 결국 나보고 오라고 하는 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하며 삐뚤어진 생각에 휩싸였다. 사실 우리는 평소 자신이 알지 못하는 꽤 강력한 무의식에 사로 잡혀 있고, 왜곡 된 사고를 할 때가 많다. 잠시 답장을 좀 미루고 친구의 메시지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내 안에 익숙해져 버린 거절감, 어긋났던 약속들에 대한 실망스런 경험, 그간 쌓아두었던 괘씸함, 또는 너그러움 없는 빈약하고 옹졸함 들이 얽혀서 꼬인 마음이 보인다. 그랬구나! 그런 내 마음을 도닥인다 그리고 친구의 메시지와 내 마음을 친절한 태도와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쓰담 쓰담. 잠시 마음을 바꾸었을 뿐인데, 내 안에 물감 한 방울이 물에 퍼지듯 아늑함이 스민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일이 늦나보다. 약속 시간이 8시인데, 시간 맞추기 어려우니 오라 하나 보다. 차도 보내주고 올 때도 보내 준다고 하다니. 너무 고맙네. 서운 할 이유가 없지‘ 싶었다. 이럴 땐 내가 찾아 가는 게 낫겠다. 그러고 보니 너무 고마운 제안이다. 과거 좋은 말도 왜곡해서 듣고, 감정적으로 경솔한 결론을 내리던 실수들이 떠오른다. 수서에 도착해 친구의 일터 근처에서 밥을 먹는데, 열시, 열한시가 되도록 직원들이 지나다니며 인사를 한다. ‘원래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구나!’ 싶었다. 와서 친구가 있는 곳과 일터와 직원들을 보니 바쁜 와중에 미리 몇 주 전에 시간을 잡고, 약속을 지키려고 하고, 올 때 갈 때까지 사려깊이 배려한 친구에게 더없이 고마운 맘이 들었다.

친구는 전 보다 훨씬 성장한 느낌이었다. 어깨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늘어뜨린 채 차분하고 정성스레 한 수저씩 뜨는 친구의 모습이 내게 영감을 주었다. 삶에 힘을 뺀 그 모습이 무게 있고 안정감 있어 보인다. 나도 저 친구처럼 깊어가는 중일까? 아까 서운해서 "됐어 오지 마!" 했다면 이런 울림은 없었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경험은 사소한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 없다. 오래 묶은 친구와의 건조한 관계가 촉촉하니 물기 어리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의 단조로운 관계가 새로워졌다. 회복의 기적. 바로 이것이 리바이벌이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십년, 이십년 지쳐가는 부부들이 떠올랐다. 끝없이 싸우고 포기한 가족 관계들. 반복되는 일상. 일. 지루하고 메마른 삶. 그 속에서 답이 없다 생각 될 때. 결국 관계를 끊어 내는 일 밖에는 선택권이 없을 때 우리에게 작지만, 이런 리바이벌의 체험이 일어나면 좋겠다. 부모와 자식이. 오래된 연인이. 이별 앞에 선 부부의 관계에 호기심과 감동이 다시 시작 되면 좋겠다.

그것은 삶의 작은 멈춤에서 시작한다. 희랍어에 '에포케'라는 말이 있다. '멈춤, 있는 그대로 둠'이란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판단 중지'로 사용되었다. 리바이벌을 경험하고 싶다면 '에포케' 하자. 에포케로부터 시작해 보자. 리바이벌의 사건은, 그 멈춤 가운데, 있는 그대로 사물을 바라보는데서, 그리고 내 경험과 이해를 내려놓은 채 판단 없이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코로나가 한창인 가운데, 요즘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무너지고 멈추었다. 사실 어쩌면 그렇기에 리바이벌의 새 세상이 시작되는 문 앞에 서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움트는 생명력 가득한 새로운 계절을 소망한다. 매일 지금 이 순간 나와 너, 우리, 세계 속의 리바이벌을 기대해 본다. 이 메마른 시간이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삶의 각 정류장마다 우리는 꼭 마주쳐야 하는 것들을 배우게 된다. 때로 즐거운 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여정이다. 우리는 그 여행에 초대 되었고 모든 일은 존재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해야 한다.

 

모호한 이 긴 멈춤의 시간을 충분히 경험하고, 그 고통과 연단 속에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세상은 새롭게 보일 것이다. 새 바람이 분다. 준비가 되면 바람을 타고 나아갈 수 있다. 나를 이끄는 그 운명의 바람을 느껴보라. 자연의 순응하는 바람. 자연스럽지만 강력한 바람. 그것에 느슨히 매달려 우리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엔가 새 계절이 올 것이다. 무너진 곳, 황폐한 곳에서 살아가던 피해자의 신분에서, 생존자로, 그리고 나아가 생존에만 급급했던 서바이벌의 삶에서 새로운 차원으로의 변환이 시작되는 리바이벌의 삶으로 나아가자. 

 

Profile 
(사)한국코치협회 인증 프로코치 KPC(Korea Professional Coach)
연세대 상담코칭학 석사
에니어그램 전문 강사

저작권자 © 피플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