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기의 미술여행] 뭉크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도시, 노르웨이 오슬로(Oslo)

  • 입력 2019.09.05 15:06
  • 수정 2019.09.05 18:14
  • 기자명 김석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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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로 가는 북동항로를 개척한 16세기 네덜란드의 탐험가 빌렘 바렌츠의 이름에서 비롯된 ‘바렌츠 해’로부터 동쪽으로 ‘보트니아 만’과 ‘발트 해’,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해’와 ‘북해’를 끼고 남쪽으로 뻗어 내린 ‘스칸디나비아반도’가 있다. 그 곳에 있는 노르웨이를 찾아가기 위해 비행기 속에서 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이 계속되지만 북유럽에 대한 기대와 흥분은 감출 수가 없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도착하는 순간 온통 나무와 호수로 뒤덮인 넉넉한 전원 위에 아름다운 집들이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노르웨이는 인구가 450만 정도고, 국토 면적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1.7배에 달한다. 자연 환경이 아름답고 유전이 발굴되어 부국의 풍요를 누리는 나라로 국민소득이 7만불을 넘는다. 
소외된 민족들이 살았던 볼 것 없는 빙하로 이루어진 과거의 땅에서 천혜의 보물인 맑은 물과 공기, 그리고 산악의 푸른 녹음을 자랑하며 노르웨이 인들이 살아가고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 하에서 겪었던 전쟁의 아픔과 가난을 잊기에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그들은 이제 희망과 행복이 샘솟는 미래의 땅에서 잘사는 노르웨이를 만들어가고 있다. 

노르웨이는 북극이 가까운 지형적인 영향을 받아 많은 탐험가들을 배출해냈다. 오슬로는 여러 차례 북극탐험과 북대서양의 해양탐사를 지휘하였으며,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난센(1861~1930)의 고향이자, 1909년 미국의 탐험가 로버트 E. 피어리(Robert Edwin Peary, 1856-1920)가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1911년 4명의 동료와 52마리의 개썰매를 끌고 남극으로 달려가 그해 12월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한 아문센(1872~1928)의 고향이다.
조각가 비겔란과 ‘절규’의 작가 ‘뭉크’, 그리고 ‘인형의 집’을 쓴 ‘입센’의 고향이기도 한 오슬로에는 화가 뭉크의 대표작 ‘절규’가 소장되어있는 국립미술관을 비롯,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63년에 건립한 뭉크미술관, 비겔란 미술관, 비겔란 조각공원, 입센 박물관 등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많이 있다.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은 서른다섯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뭉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뭉크는 입센의 작품 ‘왕위를 노리는 자들 (The Pretenders)’ 속에 삽화를 그렸고, 희곡 ‘헤다 가블러(Hedda Gabler)’와 ‘유령(Ghosts)’이 무대에 올려 졌을 때 무대장치를 설계하기도 하였다. 
뭉크는 노르웨이의 명문가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뭉크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돌아가셨고, 10년 뒤에 누나도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누이동생은 정신병에 걸렸고, 아버지와 남동생도 뭉크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 불운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뭉크는 항상 죽음에 이르는 공포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체험한 불안과 공포는 언제나 그의 곁에서 그를 긴장하게 했고, 웃음이 없는 그의 생활은 언제나 우울했으며, 그가 그리는 작품 속에는 늘 그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의 그늘이 그려지곤 했다. 
 

뭉크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나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나 그림을 향한 열정으로 그는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공예 학교를 다니게 됐다. 1890년대에 왕성했던 독일 그래픽 아트의 영향을 받아 판화도 제작했으며, 1892년에는 베를린에서 전시회도 가졌다. 1910년에는 노르웨이의 오슬로에 정착하여 노년을 홀로 보내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그는 그가 모은 모든 재산과 그림, 판화, 소묘 등의 작품들을 모두 오슬로 시에 기증하였다.  
 뭉크는 성장과정에서 받은 충격으로 인간의 비극적 측면과 절망에 빠진 증오로 사물을 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 하늘·땅·다리에 얽힌 사랑들도 강렬한 색채 속에 부정확한 선으로 그림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1892년 뭉크는 일기에서 앞으로 그려질 ‘절규’를 이렇게 예고했다.  
‘태양이 지는 시간에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고, 검붉은 구름이 검푸른 피오르드 위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암흑의 절규가 자연을 갈기갈기 찢고 있는 공포의 현장에서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있었다.’ 

그가 쓴 일기의 내용은 바로 1년 뒤 그의 캔버스 위에 ‘절규’라는 작품으로 표현 되었고, 그 작품은 뭉크를 대변하는 작품이 되었다. 뭉크는 초기 작품에서 자신의 내성적인 측면을 표현하는 우울한 작품을 많이 그렸으며, 후기에는 인간적 삶의 기쁨과 자연의 풍요로움을 그리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 속에 인간이 존재함을 중요시했으며, 그래서 그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풍경화도 그렸다. 오슬로 대학교의 강당에 그린 벽화 ‘태양(The Sun)’을 통해서 북유럽의 긴 겨울을 살면서 따사롭게 찾아온 여름의 태양을 그릴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뭉크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뭉크는 19세기 자연주의 회화의 경직된 아카데미즘을 부정하고 20세기 표현주의 미술을 탄생시켰다. 그는 ‘나는 숨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의 작품을 분명 이해 할 것이다.’ 라고 썼던 젊은 날의 다짐을 평생 동안 인내로 실천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 살아있는 강렬한 호소력은 노르웨이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들까지도 그를 이해하고 또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雨松 김석기(W.S KIM)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경희대, 충남대, 한남대 강사 및 겸임교수 역임
프랑스 몽테송아트살롱전 초대작가
프랑스 몽테송아트살롱전 A.P.A.M 정회원 및 심사위원
개인전 42회 국제전 50회, 한국전 4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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