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금 여기'에 흐르는 '그때 거기'

특별한 열정 _ '강박'

  • 입력 2019.08.01 15:38
  • 수정 2019.08.01 15:47
  • 기자명 조신애 K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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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많은 불가능한 언덕을 오르게 한다. 인생의 한 고비 한 고비 앞에서 그것은 삶을 이끌어 가는 추진력이 되어준다. 하지만 때로 그 에너지는 특별한 형태로 삶을 지각하도록 조종하고 판단을 흐리게도 하는데, 강박관념처럼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지배한다. 어쩌면 우린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요동치는 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주 좌지우지되는 중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것은 마치 중독과도 같다. 중세 시대엔 이러한 특별한 강박들을 ’열정‘이라 불렀다(리차드로어, 1993). 우리는 이 특별한 열정으로 인해 삶을 한정된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매번 같은 돌부리에 넘어지고 반복되는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낯설지 않은 이 이야기는 많은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열정들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을까? 타고난 기질이나 환경적인 경험들이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마음 한편에 과거를 담은 추억의 액자가 있을 것이다. 살면서 많은 기억들이 흐릿해지는 일이 자연스럽지만 어떤 것은 망각의 섭리를 벗어난 것이 있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속에 저장된 장면들. 삶의 어떤 문턱에 설 때면 마음이 그곳으로 소환된다. ‘그때 그렇게 애틋하고 풋풋했던 삶에 대한 애정이 있었지’ ‘아장 아장 한걸음을 떼듯 자라면서 겪는 성장통이 있었지’ ‘그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했었지’.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상처 입던 시간들이 여전히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그중에 어떤 것은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의 평가를 벗어나 ‘해석’이란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납득’할만한 것을 내놓으라며 우리의 인간관계를 흔들어 놓는다. ‘그때’라는 ‘과거’는 힘이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러한 ‘지금 여기’에 흐르는 ‘그때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얼마 전 돌직구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왜 그 친구와 매번 부딪히면서 피하지 않나요? 불나방 같군요. 다신 상대하지 않겠다고 하고 또 얽히고” 어떤 사람과의 반복되는 마찰로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들어가는 머리 나쁜 불나방 같다고 누군가 놀려댔다. 그래 나는 왜 이렇게 매번 같은 유형의 사람과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유독 저런 상황에선 대책 없이 휘둘리지? 무엇이 나를 사고하지 않는 멍청이로 만드는 것일까?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자동반사적으로 반응했던 일들에 대한 후폭풍은 더 크게 온다. 그것이 갈등을 일으켰었건 아니었건. 대항했건 순응했건 상관없이 말이다. 

과거 여행 _ ‘그때 거기’
잠시 과거를 여행해 보려고 한다. 유독 초라함을 견디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몸도 마음도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과 떨어져 따로 할머니와 살았다. 한 번씩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할머니와 가족들은 갈등을 겪었다. 어릴 땐 왜들 그렇게 싸우며 살았는지. 유독 우리 가족만 그러했다 싶던 때가 있었으나 살다 보니 시끄럽던 역사가 한두 가족만의 것은 아니더라. 때로 밥상이 엎어지고 그릇들이 산산이 조각나고, 던져진 음식물들로 벽지가 색색 물들곤 했다. 가끔 어린 시절 장면들이 무슨 희극처럼 슬로모션으로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한 번은 부모님 댁에 방문했다가 돌아가려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중에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가족이 한바탕 싸우고 난 후였다. 엄마는 뒤뜰에서 홀로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때 비닐 문 사이로 손만 내민 채 내게 동전 하나 쥐여주며 잘 가라고 하는데 그 눈빛이 내내 선명하다. 묘했다. 세상에서 가장 상처 입은 자처럼 눈에는 원망과 서러움과 분이 가득 차 있었다. 아이 앞에서 보여주는 엄마의 모습은 ‘엄마로서’가 아닌, 학대받은 어떤 ‘구겨진 생명체’처럼 보였다. 한번은 반대로 엄마가 할머니와 내가 사는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몇 마디 말이 오고 가더니 엄마는 금세 할머니에게 내쫓겼다. 엄마가 가버린 것을 두고 투덜거리자 분노한 할머니는 “그럴 거면 네 엄마 따라 가라” 버럭 소리를 지르신다. 그 길로 뛰쳐나갔다. 길을 헤매며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모를 외로움에 스스로 처지를 처량해 했던 것 같다. 원망인지 서러움인지 뒤섞인 감정으로 눈물범벅이 되는 바람에 길거리의 네온사인이 온통 일그러져 괴물처럼 보였다. 눈을 비벼대며 한참을 길을 찾아 헤매다 우연찮게 버스 정류장에 닿았다. 그런데 저만치에 엄마가 마침 버스에 올라타려는 중이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엄마를 저 앞에 두고 아이는 작은 골목 뒤로 몸을 숨긴다. 달려가지 않았다. 엄마가 버스표가 없었는지 버스에서 내려 구멍가게로 들어간다. 버스표를 사는 엄마의 뒷모습을 숨어 지켜만 보았다. 

나는 왜 그 순간 거기서 멈추었을까? 건강한 애착 관계가 아니었던 진단 정도야 쉽게 내릴 순 있겠지만 그 아래 가장 밑바닥에 숨겨진 이유에 대해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게 한다. 대체 7살 밖에 안 된 아이는 무슨 복잡한 생각으로 골목 뒤편에 숨어 엄마를 지켜보기만 했던 것일까? 온갖 복받치는 감정으로 휩싸여 미친 듯이 달려오던 발걸음을 딱 그곳에서 멈추었던 것일까? 시간이 흐르고 어엿한 중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면 아이는 특별한 상황만 되면 그때 그 골목길에 멈추는 일을 반복한다. 그때 거기에서 일어난 사건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반복된 패턴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서를 만나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면 그때 무엇이 부재했던 것인지 탐색해 볼 수 있다. 알 수 없던 특별한 동기들이 건설적인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면 괜찮다. 하지만 반복적인 패턴으로 실패하는 일이 빈번하다면 그 밑바닥에 있는 힘을 찾아내는 일이 본질적인 일이 된다. 매번 어떤 특별한 상황이 닥치면 사고하지 못하고 멈추었던 것.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평범한 일 상속에 끊임없이 소환되어 내 삶을 조정해 오고 있었을지 모른다. 갑자기 ‘취소행위’(방어기제)를 하고 또는 무턱 된 복종으로 아니면 오히려 극단적인 경멸로 반응하기도 한다. 그런 점은 매번 인간관계에서 구멍이 된다. 취약점이다. 지금 여기 존재 방식에 부재하는 것. 그곳에 나의 억류된 마음, ‘정서’가 있다. 

한 번씩 부모의 집에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시간엔 하늘이 석양으로 붉었다. 만나기만 하면 늘 다툼으로 이어지고 나면 초토화되던 집안. 깨진 그릇을 정리하고, 던져진 음식물로 물든 벽지를 걸레로 닦아내며 서럽던 눈물을 훔치던 이들. 그 작은 시골 동네 위로 퍼지던 노을. 그때 덮쳐오던 생의 쓸쓸함. 온몸과 영혼에 스크래치를 주며 다가오던 생에 대한 이미지는 초라함이 주도적이었다.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 마음들이 참으로 애처로웠고, 존중받고 소중히 여겨지지 않아 내팽개쳐진 마음들이 목에 가시같이 불편했다. 인생이 너덜너덜 처절해 보였다. 세상에서 덮쳐오는 감당하지 못할 거대한 ‘우수 어린’ 그림자가 두렵기까지 하였다. 삶의 애환은 아직 자라려면 한참인 아이를 숨 막히도록 짓눌렸다. 감당하기엔 아직 힘없던 아이는 그 먹먹함에 늘 체기를 달고 살았다. 

그래서 그랬다. 그렇게 힘없이 버스 위를 오르던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도, “엄마에게 가버려”라며 이제 막 7살이 지나는 아이를 매몰차게 내쫓아버린 할머니도, 그 와중에 버스표가 없어 다시 내려 구멍가게로 들어가는 그 걸음의 장면 하나하나에 묻어져 나오는 인간의 생이 얼마나 힘이 없고 초라한지, 그 앞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침몰당하는 듯 했다. 그때 거기에서 느꼈던 ‘정서’가 매번 지금 여기에서 같은 골목길에 멈추게 한다. 그때와 비슷한 순간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사고하기를 멈추고 그날의 정서로 돌아간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갈등하게 된다. 쓸쓸하고 초라한 영혼의 가난한 마음이 느껴지면 가슴은 이내 추스를 수 없는 연민으로 가득 차 감정적이고 자동반사적인 슬픔. 분노. 충격에 휩싸인다. 

긍휼의 마음 ‘연민’을 선물 받다
그런데 말이다. 이러 함들은 때로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 초라하고 서러웠던 시절에 대한 정서를 토닥거리고 나니 그 고통 속에서 ‘연민’이란 은총이 선물로 온다. 이것은 더 이상 사람들을 곤욕스럽게 하거나 트러블을 일으키는 말썽꾸러기가 아닌 사람을 이해하는 선물이 된다. 적어도 알아차리며 스스로 선택한 행동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아 사람들은 다 쓸쓸하구나. 외롭구나. 초라하구나’ 깊이 공감하고 연민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 일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선물 받는 일이었다.

자신만의 신화를 살라
인생들이 치열한 씨름을 하며 생과 맞장 뜨던 중에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이 되었던 작은 아이는 지금 여기에 생존자로 서있다. 위대한 일이다. 이것은 신화이다. 비단 누구의 신화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어미는 어미대로, 아비는 아비대로, 할미는 할미대로. 그 누구는 그 누구대로. ‘자신만의 신화’를 살아낼 운명을 부여받았다. 세상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렇게 폐허 같은 삶에서 피어나는 꽃 한 송이처럼 자신만의 숭고하고 경이로운 삶을 살아간다. 이것은 마치 신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거룩한 ‘누미노제’(R. Otto)의 감정과도 같다. 그 거대한 신의 섭리 앞에서 겸허해진다.

역설 속에 피는 꽃
고통이 주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누구의 잘못일까? 고통은 그저 주어진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느라 보냈던 많은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 고통 속에서 배울 준비가 된 것이다. 수없이 멈추었던 골목길에 섰어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볼 수 없던 것. 의문투성이였던 넘어짐들. 똑같은 돌부리. 수없이 방황하고 흔들렸던 그 시간들이 누군가에겐 허송세월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흔들렸기에 이제는 볼 준비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내부에 머물 용기를 갖게 된다. 끊임없이 도망쳤던 그 골목길에 다시 돌아가 정서적 진실(W. Bion) 을 똑바로 바라볼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으로 멈추었던 아이를 위로하고 끌어안을 때 역사는 다시 흐르게 된다. 멈춰진 이야기가 해석되어 흐르고, 흩어졌던 삶의 조각들이 납득이 되어 연결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나 자신은 다시 새롭게 된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연결성을 갖게 된다. 고통의 진흙 속에서 역설적으로 꽃이 핀다. 우리 모두의 삶에도 그 꽃이 피어나길 소망한다. 이제 볼 준비가 된 당신의 삶에 이야기가 다시 흐르기를 기도한다.

 

Profile 

연세대 상담코칭학 석사
(사)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 KPC(Korea Professional Coach)
에니어그램 전문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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