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즈넉한 자연 경관을 세계로 전하는

운원(雲園) 신현조 화백

  • 입력 2019.07.26 18:23
  • 수정 2019.07.26 18:45
  • 기자명 김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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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한 신념 속에서 현대적인 기법을 더해 창조적인 예술을 선보이는 운원(雲園) 신현조 화백은 60여 년이 넘는 화력과 다뤄 보지 않은 소재나 장르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을 보여줬다. 그의 그림에는 소재, 장르에 제약받지 않고,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이라는 것’이라는 운원의 미술관과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가 담겨있다. 여든이 훌쩍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경기도 양평의 집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남다른 재능 보여준 화동(畵童)
운원(雲園) 신현조 화백은 1933년 전남 영암 출생으로 부농의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눈에 띄는 재능을 보여주며 촉망받던 화동(畵童)이었다. 할아버지의 영정을 직접 그리기도 했고, 좌우이념이 대립했던 학창시절 당시 반공 포스터를 그려서 상을 휩쓸기도 했다.
“어렸을 때 상여막에서 놀았던 적이 떠올라. 상여 한 채를 구성하는 온갖 기물과 크고 작은 갖가지 꽃들의 색깔에 취해 해지는 줄도 모르고 마냥 취해있었지. 그때의 색채가 평생의 화업이 돼서 다양하게 펼쳐지는 또 다른 색감의 모티브가 됐어.”
학교가 끝난 뒤에는 그는 외숙부가 운영하는 도자기 회사에서 어해도와 사군자를 도자기에 습작했고, 당시 조선대학교 교수였던 양수아 선생으로부터 데생과 소묘 등 서양화를 배웠으며 소송(小松) 김정현 선생으로부터 6개월 동안 사군자와 화조 등을 사사받았다.

배울수록 커지는 미술 열망
“그림은 맛이 있어야 하며 그 맛은 작가의 사의적 맛과 붓 맛, 그리고 색(色) 맛이 어우러져야 나는 것이라고 소송 선생은 누누이 강조했어.”
운원에 따르면 소송 김정현 선생은 당시 수묵으로만 그리던 사군자의 정형을 거부한 채 청(靑)난초나 붉은 대나무도 그릴 수 있다는 파격에 가까운 미학을 보여줬다고 한다. 운원에게는 다소 어려운 경지였지만, 당시 6개월 동안 소송 선생으로부터 하루에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10장씩 그리는 혹독한 수련을 거치게 된다.
이런 과정은 배움의 열망을 키웠고, 동시에 예리한 선과 힘찬 운필력, 강렬한 색조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그려내는 원동력이 됐다. 이후, 운원은 19살 때 더 깊은 미술 공부를 위해 유학을 준비했다. 당시에는 정식 유학을 위해서 한국과 일본 모두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를 어기면 무조건 징역 7년인 시절. 게다가 운원이 미술보다는 법대를 공부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도 있었다.

특이한 교수법으로 실력 쌓아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기에 운원은 정든 집과 고국을 떠나 일본 도쿄의 요도바시미술학교에 입학해 미술 전반에 관해 기초 수업과 실기 위주로 배웠다. 특히, 사무라이식 훈련과 흡사했던 교수법을 통해 실력을 갈고 닦았다.
“참으로 특이하고도 인상적이었지. 모델을 앞에 놓고 5분간 그린 다음에 모델 없이 5분간 상상으로 그리는 거야.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거지. 거울 속 자화상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고.”
이런 훈련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력과 기억력을 기르는 데 뛰어났으며 손놀림의 빠르기, 원근과 명암의 색채감을 집중적으로 터득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즉, 직관과 객관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훈련이었다. 또한, 전형적인 일본 화법에 현대적 기법을 도입한 수채화가인 오이시데스로 교수에게도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장벽 넘어선 운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운원의 다음 목표는 ‘등용’이었다. 당시 화단에 등단하는 길은 국전과 백양회전에서 입상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운원도 매년 1회 열리는 국전과 봄, 가을 2번 열리는 백양회전에 빠짐없이 작품을 출품했다. 그는 국전을 통해 화단에 등단했고, 1972년에는 37살의 나이로 백양회 최고상을 받았다. 당시 백양회전 중 동양화 부문은 심사규정이 까다로워서 국전에서의 특선보다 더 권위 있던 시절이었다.
특히, 운원의 작품은 10년 동안 백양회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차지했는데,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연속 입·특선하는 위엄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당시 미술계에서 크나큰 사건이었는데, ‘학맥’과 ‘인맥’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특정학파나 인맥이 아니면 화가로서의 등단, 특히 중앙무대의 등단이 여간 어려운 시절이었지. 그때 당시의 미술계와 사회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미술문화의 세계화 이끌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해온 운원. 국립 현대미술초대전, KBS 등 언론사와 유명 박물관에서 30여 회가 넘는 초대전과 4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운원의 활동 무대는 세계로도 뻗어나갔다.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대만,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한국 고유의 화풍을 선보이며 우리 미술의 독특성과 우월성을 만방에 알린 운원은 크고 작은 미술전의 심사위원과 위원장, 부산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를 역임했고, 각종 기획전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바쁜 와중에도 동국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수료하고, 미국 유니언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학구열을 보여준 운원. 그의 작품은 호암미술관, 청와대, 서울공항, 한국마사회, 한국은행 등에서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활동 중 운원은 70여 차례에 이르고 있는 불우한 이웃돕기 기획전을 가장 보람있는 활동으로 꼽았다.

운원의 독보적인 화론, 수(守)-파(破)-리(離)
운원의 화론은 독보적이다. ‘수(守)없이 파(破)를 없애고, 파(破)없이 리(離)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수(守)-파(破)-리(離)’로 이는 운원이 지금도 추구하고 있는 화론인데, 우리의 민화에서 화려하고도 현란하게 표출되고 있다.
“수(守)는 ‘지킨다’는 의미로 형이하학적인 물상의 가시적 세계를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것을 말하는거야. 파(破)는 ‘깨트린다’는 뜻으로 고정관념이나 기존 현상으로부터의 탈피로서 소재나 대상을 억제시키는 변형을 의미해. ‘떠난다’는 의미의 리(離)는 대상의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 작가가 지향하는 절대 자유의 미학을 누린다는 거지.”
민화는 장식 장소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갈래로 분류되는데, 운원이 천착하고 있는 화목은 장생조이다.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예리한 선과 힘찬 운필력, 삼원법을 무시한 평면구성에 강렬한 색조가 드러나며 얼핏 보면 도자기 표면의 모자이크나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케 하고 있다.

모름지기 모든 예술가는 남들이 싫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독특성과 보편성을 얻기 위해 고뇌하고, 사색하며 뼈를 깎는 인고의 세월 속에서 자신을 그림에 녹여낸다. 운원 신현조 화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전통미술의 장인이자 가장 드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운원은 동양화가이면서도 서예와 화를 겸비하기 위해 한평생을 노력했다. 또한, 그가 보여준 예술혼과 조형 양식은 오로지 우리 것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동시에 전통을 이어가고, 개조하며 한국화의 정체성을 세계적 위상으로 확립하기 위한 고심과 고뇌의 결과를 남겼다. 그렇게 우리 전통미술사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운원과 뜻깊은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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