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기의 미술여행] 붉은 광장, '레닌의 묘와 성 바실리 성당이 있는 곳'

  • 입력 2019.07.01 18:05
  • 수정 2019.07.01 18:07
  • 기자명 김석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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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독일의 한 19세 청년이 경비행기를 타고 '붉은 광장'에 불시착하는 이해 못 할 사건이 발생하였다. 물샐틈없는 경계가 삼엄한 소련 공산당 중심부, 붉은 광장에 독일 청년의 장난감 같은 경비행기가 경계망을 뚫고 착륙한 것이다. 이 사건 소식을 들은 세계인들은 모두가 놀랄만한 사건이라고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경비망을 허술하게 관리했던 군 장성에서부터 모든 관련자들이 제거되었다. 제거된 장성들은 1985년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개혁정책에 대하여 반대하던 사람들이었다. 소년의 경비행기 사건이 1986년 고르바초프가 독일을 방문한 바로 직후 일어난 일이어서 일부에서는 개혁정책을 반대하는 군 장성들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고르바초프의 고도의 전술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간직한 붉은 광장의 화려했던 역사가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과거로 사라졌다. 육해공군 퍼레이드와 영웅 환영식, 공산당 집회 등 거창한 행사로 격동의 러시아 500년을 지켜온 광장이 바로 붉은 광장이다. 모스크바 주민들이 운집하여 황제가 선포하는 칙령을 들었던 곳이며, 각종 의식이 이루어지고, 형이 집행되던 곳이다. 1812년에는 나폴레옹이 이곳에서 열병식을 가졌고, 전쟁에 이기면 승리의 행진을 하던 곳이다. 현재는 차량이 없는 광장으로 역사적 의미만을 갖는 곳으로 레닌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붉은 광장은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의 광장, 파리의 화합의 광장 등과 같이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세계적인 광장이다. 

성 바실리 성당
성 바실리 성당

광장의 중앙에 있는 1929년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피라미드형의 레닌의 묘가 붉은 광장의 주인이다. 소련이 해체된 직후 레닌을 땅에 묻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공산당에 의하여 무시되었고, 연간 200만 달러의 사체 보존 자금을 써가면서 어려운 경제 속에 묘소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은 젊은 시절, 혁명적 민주주의와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혁명서적을 탐독한 사람으로 1887년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불법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891년 11월 법률 졸업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여 법률 학위를 취득하였고, 1893년까지 가족이 정착해 있던 사마라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895년에는 러시아 망명 정치가들과 접촉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가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하였으나 체포되어 1년이 넘도록 감옥에 갇혀 있기도 하고, 시베리아로 3년간 유배되기도 하였다. 

 

성 바실리 성당_김석기 작가 스케치
성 바실리 성당_김석기 작가 스케치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추진을 위한 주도세력은 오직 프롤레타리아이며 믿을 수 있는 동맹자는 농민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917년 2월, 굶주림과 추위와 전쟁에 지친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군인들은 황제를 몰아내고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고, 스위스에 체류하던 레닌은 독일 정부가 제공한 열차로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1917년 7월 3일의 볼셰비키 무력시위가 임시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독일 스파이로 수배된 레닌은 핀란드로 도피했고, 그 해 11월 볼셰비키 적위대에 의하여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모든 국가권력을 소비에트가 장악하면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혁명 직후 열린 소비에트 인민 대회에서 새로운 정부 '인민위원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소비에트 정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레닌의 뛰어난 지도력 때문이었다. 레닌은 소박하고 서민적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넓은 이마에는 힘이 넘쳐흘렀고, 작은 몸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는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창조적 발전을 가져온 레닌의 사상은 그의 정통적인 이론이다. 현실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그는 끈질긴 집념을 통해 필생의 목표를 달성하였으며, 1924년 1월 21일 저녁 고리키에서 뇌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러시아 제일의 광장 안에 있는 레닌의 묘 남쪽에 모스크바 사원 건축의 상징인 '성 바실리 성당'이 있다. '성 바실리 성당'은 1588년 존경받던 예언자 '성 바실리'를 이곳에서 장사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면서 이 성당을 '성 바실리 성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을 띤, 서로 높이가 다른 9개의 '꾸뽈'들이 하늘을 향해 환상적이고 원색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러시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아름다운 양파 모양의 돔을 '꾸뽈'이라 부른다. 240여 년간 몽골에 시달리던 러시아가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반 뇌제'는 당시의 최고 건축가 '바르마와 포스닉'에게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성당 건축은 몽골과 치른 여덟 번의 전쟁을 상징하는 여덟 개의 작은 교회 '꾸뽈'과 중앙에 가장 높게 만들어진 '성모출현교회'의 '꾸뽈'이 함께 군락을 이루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붉은 광장'의 침묵을 깨고 있다. 

 

크레믈린 붉은광장_김석기 작가 스케치
크레믈린 붉은광장_김석기 작가 스케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성당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성 바실리 성당'을 축조한 건축가들을 영국으로 초대하려고 하였으나 '이반 뇌제'가 더 이상 아름다운 성당을 건축할 수 없도록 건축가들의 눈을 모두 뽑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붉은 광장의 무거운 색채 속에 누워있는 '레닌'과 화려하고 밝은 색채 속에 누워있는 '성 바실리', 두 지도자의 모습을 함께 바라보며, 봉사와 헌신으로 살다간 성인의 모습과 권력과 권세로 살다간 레닌의 모습이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결국 인생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무상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雨松 김석기(W.S KIM)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경희대, 충남대, 한남대 강사 및 겸임교수 역임
프랑스 몽테송아트살롱전 초대작가
프랑스 몽테송아트살롱전 A.P.A.M 정회원 및 심사위원
개인전 42회 국제전 50회, 한국전 4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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